한국독립군의 중국 동북지역 3대 대첩을 기념하고 독립군의 고귀한 삶과 나라사랑 정신을 깊이 새기는 제98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21(일) 오전 10시 30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사)한국독립유공자협회(회장 조영진)가 주최하고 (사)독립유공자유지계승유족회(회장 김삼열)가 주관한 이날 기념식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광복회 나중화 부회장, 승병일 독립운동유공자를 비롯한 독립유공자협회 회원, 유족,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독립군의 중국 동북지역 3대 대첩을 기념하고 독립군의 고귀한 삶과 나라사랑 정신을 깊이 새기는 제98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21(일) 오전 10시 30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사진=정유철 기자]
한국독립군의 중국 동북지역 3대 대첩을 기념하고 독립군의 고귀한 삶과 나라사랑 정신을 깊이 새기는 제98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21(일) 오전 10시 30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사진=정유철 기자]

 

한국독립군의 3대 대첩인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1933년 대전자령 전투는 국권 상실 후 간도 지방 등 동북 3성으로 이주한 민족지도자와 의병, 국민으로 구성된 한국독립군이 일본군에 맞서 크게 승리한 독립전쟁이다. 무기와 장비는 물론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불굴의 투혼으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의지와 자주독립의 열망을 세계만방에 알렸으며,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신념을 심어주었다.

이날 기념식은 기념사, 축사, 기념 영상 상영, 성명서 낭독, 독립군가 합창, 만세3창으로 구성된 1부 기념식에 이어 2부 강연회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사)한국독립유공자협회 조영진 회장은 기념사에서 “한국독립군의 3대첩 승전은 항일무장투쟁과 의열투쟁의 발화점이 되었고, 우리 민족에게 광복의 희망을 안겨 주었으며, 겨레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과시하는 쾌거였다”며 “한국독립군의 살신성인의 정신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오늘의 우리가 소중히 간직하고 계승해야 할 가치이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오늘 행사가 조국광복을 위하여 이국땅에서 고군분투하셨던 독립군의 고귀한 삶과 나라사랑 정신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기고, 후손들에게는 애국선열들이 물려주신 자랑스런 조국을 아끼고 발전시킬 것을 다짐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유족청년회 대표 최하은, 태현식 씨가 일본의 참회와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독립유공자유족청년회 대표 최하은, 태현식 씨가 일본의 참회와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축사를 통해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일본군을 완파한 봉오동 전투, 일본 정규군 수천 명을 격멸하는 놀라운 전과를 기록한 청산리 대첩, 그리고 일본군 1개 연대를 초토화한 대전자령 전투는 독립전쟁사에 길이 남을 쾌거이다”며 “비록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하고 역전의 용사들은 하나둘 세상을 등져갔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 전 한국독립군이 보여준 위국헌신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대한민국의 역사에 명예롭게, 또 자랑스럽게 남을 것이다”고 말했다.

박유철 광복회 회장은 광복회 나중화 부회장이 대독한 축사에서 “대한독립군단이 이룬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3대첩 전승의 역사는 우리민족의 항일 독립무장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독립군의 용맹과 지략, 백절불굴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준 빛나는 전투였다”며 “조국광복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가슴과 기억 속에 자랑스런 ‘승리의 기억’으로 남아 고난에 처할 때마다 독립투쟁의 목적을 잊어 버리지 않게 하는 굳건한 이정표가 되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독립군 선열님들께서 거두신 값진 전승의 경험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1941년 12월 10일 한국광복군의 대일선전포고로 이어져 조국광복의 초석이 되었으며, 조국광복을 이룬 뒤에는 우리의 소중한 조국인 대한민국을 가꾸고 발전시키는 저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국회의원은 축사에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3대 대첩인 봉오동, 청산리, 대전자령대첩은 여전히 역사 속에 길이 남아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정신을 깊이 감화하고 있다”며 “그러나 일본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위안부 할머니들께 전혀 사과를 하지 않으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만행을 뉘우치지 않고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태도는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고 말했다.

제98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21(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역사어린합창단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군가, 태극기 등을 합창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제98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21(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역사어린합창단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군가, 태극기 등을 합창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한국독립군 3대 대첩을 영상으로 소개하고 이어 독립유공자유족청년회 대표 최하은, 태현식 씨가 일본의 참회와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에서는 “우리는 우방, 동맹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강대국들의 이익과 패권싸움에 우리 민족이 또 다시 유린당하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은 선열들께서 목숨 바쳐 지켜낸 이 금수강산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항일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 땅에 어떠한 침략도 전쟁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고 밝히고 △일본은 과거 잘못을 석고대죄 사과하고 피해자들에게 즉시 배상하라△일본은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고 독도에 대한 도발책동을 즉각 중지하라△이 땅에서 전쟁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일본은 동북아 번영과 평화정착에 대한 국제사회 노력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기념식에서 역사어린합창단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군가, 태극기 등을 합창했다. 승병일 애국지사의 선창으로 다함께 ‘대한민국 만세’ 3창하고 1부 기념식을 마쳤다.

2부 강연회에서는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가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대첩의 승전과 현대적 의미”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제98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21(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승병일 애국지사의 선창으로 참가자 모두 '대한민국 만세' 만세 3창을 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제98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21(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승병일 애국지사의 선창으로 참가자 모두 '대한민국 만세' 만세 3창을 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신 교수는 “만주는 한반도와 인접해 있어 접근이 쉬운 곳이다. 일본의 직접 지배가 미치지 않은 곳이기도 하여 국내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항일운동을 벌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개간하지 않는 땅이 많아 생산에 기반을 둔 항일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다. 1910년 이전부터 민족운동가들이 만주를 주목한 이유이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3·1운동 직후부터 ‘애국열’에 불타는 사람들이 만주에 모여들면서 수많은 항일단체가 결성되었다. 동만지방에는 국민회, 대한군정서, 광복단, 군무도독부, 의군부, 신민단, 의민단, 국민의사회, 훈춘한민회 등등이 었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드니 총을 지급할 수 없어 나무로 어깨총을 하고 제식훈련을 받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고 소개했다.

신 교수는 “봉오동에는 최명록 3형제가 일궈놓은 경제적 토대가 있었다. 그곳은 깊은 골짜기여서 무력을 보위하며 대한국무도독부 이외에 신민단, 대한독립군 등의 군대들이 집결할 수 있었다. 삼둔자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이 집결한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대한군무도독부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골짜기 가장 깊숙한 곳에 매복해 있다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이를 봉오동 전투라 한다”고 설명했다.

제98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21(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신주백 연세대 국학원 연구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제98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21(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신주백 연세대 국학원 연구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신 교수는 “일본은 3·1운동 이후 조선을 안정화시켜 통치를 지속하고자 헌병경찰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기조를 바꾸고 있었다. 만주에서 독립군의 활동은 이를 저해할 우려가 있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 시베리아, 관동주(여순, 대련)에 있던 일본군을 동만주와 남만주 일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며 “동만주의 많은 독립군은 지형에 익숙하고 동포들도 거주하는 백두산을 향해 이동하였는데, 이를 간파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하여 독립군은 1920년 10월 18일부터 산발적인 교전을 벌여 26일까지 청산리 일대 곳곳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독립전쟁이다”라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만주에 군대를 주둔하게 됨에 따라 독립군도 조직화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지청천을 사령관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을 즉각 편성하였다. 한국독립군은 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중국호로군사령관(中國護路軍司令官)과 연대하는 활동을 주로 벌였다. 1933년 한국독립군은 대전자령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대전자령은 오늘날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일대에 있는 고개로 ‘태평령(太平領)’이고 부른다. 그해 7월3일 일본군은 한중연합군이 숨어 있는 줄 모르고 고개에 진입하였다. 일본군의 후미가 산중턱에 이르렀을 무렵, 연합군은 일제히 사격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대부분 총탄에 쓰러졌으며, 4기간의 격전 끝에 이즈카 부대는 전멸하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