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아주 황당한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센터장이 워크숍에서 자신은 친일파라며 천황폐하만세 삼창을 했다는 기사를 보고 친일식민사관의 뿌리가 아직도 곳곳에 뿌리박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고인이 된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2016년 시민단체와 국보 1호를 숭례문에서 훈민정음으로 변경하자는 입법청원을 제출했습니다. 숭례문 국보1호 논란사건도 식민사관의 잔재로 보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1934년 조선총독부는 ‘관보’의 고시를 통해 지정문화재를 발표했는데, ‘보물 1호 경성 남대문, 보물 2호 경성 동대문’으로 발표합니다.

이화영 인천계산공고 교사.
이화영 인천계산공고 교사.

일제는 국보 없이 보물만 지정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식민지 조선의 국보이므로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국보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는 해방 후에도 아무런 비판 없이 답습되었습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여 지정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지정하면서 남대문은 국보 1호, 동대문은 보물 1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남대문과 동대문을 없애려고 했다가 보존한 사실이 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을 즈음, 조선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916~1919년 제2대 조선총독)가 도시계획에 방해물이 되는 남대문을 파괴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이때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가 반대합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이 한양을 점령할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문이고 동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한 문이므로 전승 기념물로 보존해야 한다는 나카이의 주장에 하세가와는 파괴에서 보존으로 마음을 바꿉니다.

1927년 발행된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에서 남대문을 소개하는 글을 보면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동대문에서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남대문이 이 남대문이다.”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일제가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1, 2호로 지정한 이유는 문화재적, 미술사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선봉에 섰던 장수들이 입성해서 한양을 함락한 전승기념물이라는 인식에서입니다. 전승기념물이 아닌 서대문(돈의문)과 서소문(소의문), 동소문(혜화문)은 철거당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2005년에 국보 1호 교체 찬반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국보 1, 2, 3호는 중요도 순이 아니라, 그냥 관리번호이기 때문에 1호는 별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교체할 경우 행정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교체가 안 되었습니다. 이 논란은 2008년 숭례문 화재사건으로 다시 점화가 되었으나 이때에도 문화재위원회는 역사성과 장소성이라는 측면과 숭례문의 돌로 된 성문과 문루 중 일부가 남았다는 점을 들어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국보 지정번호는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관리번호일 뿐이라는 2005년 문화재위원회 주장과는 상반되어 문화재위원회의 반대 논리에 모순이 발생합니다. 또한, 복구 과정에서 비리는 물론 복원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숭례문은 국보 1호라는 상징성뿐 아니라 국보로서의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2016년에 국보 1호를 변경하자는 입법청원이 일어나게 됩니다.

국민여론은 국보1호를 훈민정음으로 하자는 의견이 64.2%, 숭례문으로 하자는 의견이 20%, 잘 모르겠다는 의견이 15.8%로 훈민정음을 국보1호로 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문화재위원회에서 찬성하면 교체가 가능한 일을 국회 입법청원을 해야 하고 입법청원이 제기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변화가 없습니다. 국보 1호인 숭례문과 국보 70호인 훈민정음과 서로 자리만 바꾸면 되는 일을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면서 시간을 끄는 것을 보면서 마치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만든 지도에 독도가 삭제된 것을 국회에서 지적해서 독도를 다시 그려오라고 5개월간의 수정기한을 주었는데도 5개월 후에도 독도가 삭제된 지도를 국회에 그대로 제출했던 상황이 떠오릅니다.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빨갛게 보이고 파란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파랗게 보입니다. 사관(史觀)은 마치 안경과 같습니다. 어떤 사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집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지도 논란, 숭례문 국보1호 논란의 뿌리에는 사관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내가 주인 입장에서 보느냐, 노예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대주의 사관을 가진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후 약 1천년 이상 노예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해 왔고 일제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역사를 서술하기 시작한 것은 대일항쟁기 독립투사들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친일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사관이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친일세력이 사회 기득권층이 되면서 겉으로는 국민의 눈치를 보느라 안 그런 척 하면서 암중으로는 식민사관이 활개를 치게 되었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지도 논란, 숭례문 국보1호 논란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