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연휴에 안시성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안시성’을 보았다. 명절 기간에는 역시 사극 영화가 대세인 것 같다. 영화 ‘안시성’ 외에도 사극 영화가 몇 편 더 있었지만 ‘안시성’이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물론 주연 배우나 감독의 명성도 한 몫 했을 것이고, 스크린 장악과 홍보도 주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 애정이 많은 이들에게는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면 우선 반가울 것이다. 이미 지나간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작가의 상상력과 감독의 연출을 통해 어떻게 살아있는 역사로 창조했는지가 궁금하다. 때로는 실망스러운 작품도 있었고 때로는 고증이 잘못되었거나 왜곡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작품도 있었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 교과서나 박물관 속 유물이 되어버린 역사를 살려내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심이 생기면 마음이 가는 법이고, 마음이 가면 애정이 생긴다. 역사에 애정이 생길 때 우리는 서로 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안시성 전투’ 관련 기록은 지극히 일천하다. 성주 양만춘을 다룬 당대 기록은 없으며, 천 년이 지난 조선 중기 선조 때에야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사실이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졌다. 중국에 사행을 떠났던 조선 사신이 북경에서 이를 알게 되었고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 중국의 장수와 문인이 조선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이 사실이 퍼져 나갔다.

그렇지만 한국과 중국의 정사에서 전혀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고구려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끊임없이 양만춘이라고 기억된 데에는 조선시대 해마다 빠짐없이 계속된 중국 사행의 힘이 컸다. 압록강을 건너기 전 의주에서 중국의 수도 북경에 이르기까지의 사행길은 압록강을 건넌 후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영토를 지나가는 여정이었지만, 이 여정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영토를 지나가는 코스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조선의 사신은 중국 사행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옛 유적들을 보며 끊임없이 지나간 역사를 회고하였고, 당태종을 물리친 고구려 안시성이 사행길의 유적들 중에서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중국에서 명대에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활약한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각색한 웅종곡의 『당서지전통속연의』, 곧 『당서연의』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당나라 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말하면서 당시 안시성을 지키던 고구려 장수를 양만춘과 그 부하인 추정국, 이좌승 등으로 기록하였다. 이 책의 영향으로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이라는 지식이 널리 퍼졌고, 후일 송준길 같은 조선 학자는 경연에서 조선 현종에게 직접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임을 확인할 정도였다. 명대 중국의 소설에서 나온 고구려의 장군 이름이 조선 사회에 널리 퍼진 결과 양만춘이 당나라 태종을 격퇴시킨 안시성 성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조선 초기만 해도 고구려 안시성을 평안도에 있다고 생각했던 지식이 수정되어 요동에 서려 있는 고구려의 역사적 현장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병자호란과 명나라의 멸망을 겪으면서 조선 지식인이 추구했던 북벌의 역사의식으로 고구려를 다시 인식하면서 고구려의 역사적 현장에 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갔다. 이것이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 관한 기억을 이끌어왔던 근본적 힘이었다.

양만춘이 곧 안시성, 안시성은 곧 고구려

양만춘 성주의 “안시성을 지키고 그 성민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자.” 라는 한 마디로 안시성의 군사들은 목숨을 고구려와 안시성을 지키는 데에 바쳤다.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분명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지로 들어가는 고구려인들은 흡사 신미양요 당시 조선과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미군 함대에 무릎을 꿇지 않고 끝까지 싸워 전멸한 조선의 군사들과 닮아 있다. 비록 수성은 못했지만 당시 침략군이었던 미군조차 감동했던 사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 소중한 것을 빼앗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대장기를 들었던 태학 생도 사물은 다물의 상징으로 고구려 정신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국운이 저물어 갈 때 마지막까지 고구려 정신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안시성 전투의 승리는 고구려 정신의 부활에 있다.

영화 ‘안시성’의 절정의 순간은 당나라의 토산이 무너지고 안시성의 군사들이 토산의 정상을 탈환했지만 수십만의 당나라 군대가 밀려오는 상황에서 화살은 다 떨어지고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고구려 시조신인 주몽 신의 신물인 활과 마지막 남은 한 발의 화살은 극적인 전개를 위한 그야말로 신의 한 수임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안시성의 위치이다. 영화 속에서는 구체적인 위치는 안 나오지만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 요령성 해성시 영성자산성을 안시성으로 보고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유명 한국사 강사의 영화 ‘안시성’ 해설에도 요하를 바라보고 배후에 천산산맥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지금의 요동지역에 안시성이 있었고, 백암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방어체계인 천리장성이 모두 지금의 요하 동쪽, 즉 요동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고구려시대 당대의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은 요하의 동쪽, 지금의 요양지역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 『요사』에는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요양시에 있는 요나라 동경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안시성 전투가 있었던 645년 당시의 고구려 도읍지, 평양성은 지금의 요양지역이라고 할 때, 고구려의 국경과 맞닿은 곳에 수도인 평양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안시성에서 불과 80Km 떨어진 곳에 평양성이 있게 된다. 백암성은 더 심각하다. 백암성으로 알려진 연주성산성에서는 평양성이 지척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태종이 그렇게 어렵게 88일 동안 안시성을 탈환하기 위해 토산을 쌓을 이유도 없게 된다. 백암성을 함락한 이후에 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면 되기 때문이다.

현재 안시성의 위치는 북한의 평양지역에 고구려 평양성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조선의 지배를 영구히 할 목적으로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모든 지명을 한반도 안에 갖다 놓았다, 그것이 바로 반도사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옛 고구려 영토를 지금이라도 회복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왜곡 없는 정확한 역사인식을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올바른 역사의식이 가능하고,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관계 정립과 아울러 향후 발전적 미래 역사를 열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왜곡 날조된 역사는 갈등만 양산할 뿐만 아니라 피해의식만 심화시킬 뿐이다.

『삼국사기』엔 없지만, 송나라 때 사마광이 집필한 역사서 『자치통감』에는 주필산 전투 직후 고구려 측 움직임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당 태종이 주필산에서 고구려 중앙군을 대파했다. 이에 대막리지(연개소문)는 말갈인 사절을 설연타에 몰래 파견했다." 이것은 안시성 전투의 승부를 가르는 또 하나의 결정적 한 수가 된다. 당태종이 요동으로 향했을 무렵 몽골 고원에는 설연타라는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강대국은 아니지만, 당나라 변방을 괴롭힐 정도의 힘은 갖춘 세력이었다. 이 무렵 설연타의 지도자는 진주가한이었는데 당 태종과 껄끄러운 관계였다. 당태종이 그를 포섭하려고 공주를 시집보내기로 약속했다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보낸 말갈 사절은 거대한 이익을 조건으로 진주가한에게 당을 공격하라고 제안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보낸 이 말갈인 사신의 수완이 꽤 좋았던 같다. 설연타는 7월 중순경 수 만 명의 병력으로 당나라 북쪽 국경을 침공하게 된다. 졸지에 두 개의 전선 사이에 놓인 당태종은 마음이 급해졌을 것이다. 황급히 추가로 군사를 보내 설연타의 군대를 막게 했고, 당태종이 안시성을 눈앞에 두고도 40여 일간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이다.

설연타 덕분에 안시성은 40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얻었고, 훗날 전개된 전투를 보면 안시성 성주는 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을 알 수 있다. 병사들도 충원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주필산 전투에서 생존한 패잔병 상당수가 전선에 다시 합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설연타의 침공을 격퇴한 당태종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안시성 성주와 군사들의 필사적인 방어에 막히게 된다.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만들어 시도한 공격마저 무위로 돌아가자 당태종은 결국 말머리를 돌리게 되는 것이다.

안시성을 지킨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훗날 안시성 성주로 알려진 양만춘과 그와 함께 성을 지킨 군사들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적대 세력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15만 명의 군대를 기꺼이 보내고, 군사력이 바닥나자 기민한 외교술로 대처한 연개소문도 주인공의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사서에 그저 ‘말갈인’으로만 표기된 연개소문의 사신이다. 고구려 당시 말갈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말갈과 사뭇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은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말갈인에게 고구려의 운명을 맡겼다.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을 신뢰했거나 그가 설연타의 사정에 매우 정통했기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그는 결국 설연타를 전선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안시성 성주처럼 이름을 남기지 않은 그는 안시성 전투의 숨겨진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때 칼을 겨눈 정적이었지만 국가의 위기 앞에서 기꺼이 손잡은 정치가, 주력군이 붕괴된 상황 속에서도 지도층을 믿고 분란 없이 성을 사수한 군인과 주민, 어려운 여건에서도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 말갈인 외교관, 이렇듯 안시성의 88일은 고구려라는 사회가 어떻게 위기에 대처하고 극복해 나갔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것의 밑바탕에는 고구려 정신인 ‘다물’이 존재했다. 다물은 다 물려받는 다는 뜻이다. 즉 고구려의 뿌리는 고조선으로, 고조선의 영토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 그리고 세상의 중심이라는 천하관까지 물려받고자 했던 것이다.

중원 왕조의 온갖 위협과 침략 속에서도 700년 간 만주지역에서 존속했던 고구려의 저력은 바로 고구려 정신인 ‘다물’에서 비롯되었다. 영화 ‘안시성’에서는 사물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대장기를 지키는 역할을 맡겼는데, 그는 고구려의 미래인 태학의 생도대장이었다. 처음에는 연개소문의 밀명을 받아 안시성 성주인 양만춘을 살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양만춘과 그를 따르는 안시성 성민들을 보고 그들도 고구려인이며 안시성도 지켜야 되는 고구려 땅으로 인식함으로써 고구려 정신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고구려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역사를 그리워한다면 그 시선은 만주 땅이 아니라 마땅히 이런 고구려 정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