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 성립전례을 통해 대내외에 창군을 선포했다.

지난 17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한국광복군 창군 78주년 기념식 및 학술강연회'가 열렸다. [사진=강나리 기자]
지난 17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한국광복군 창군 78주년 기념식 및 학술강연회'가 열렸다. [사진=강나리 기자]

한국광복군 창군 제78주년을 맞아, 사단법인 한국광복군동지회는 17일 백범기념관(서울 용산구) 컨벤션홀에서 기념식 및 광복군의 의의를 조명하는 학술강연회를 개최했다. 국가보훈처와 대한민국재향군인회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박유철 광복회장, 이종찬 국립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 이영수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을 비롯한 각계 기관 및 회원, 그리고 시민 12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1부 기념식, 2부 학술강연회로 진행되었다. 1부는 △국민의례 △한국광복군동지회 이영수 회장의 기념사 △피우진 국가보훈처장과 박유철 광복회장의 축사 △광복군 선언문 낭독 △군악대 및 3‧1여성동지회 합장단의 용진가, 압록강행진곡 합창 △원로애국지사의 선창에 따라 만세삼창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2부 학술강연회에서는 단국대학교 한시준 교수의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를 주제로 한 강연, 질의 응답 및 토론으로 이어졌다.

한국광복군동지회 이영수 회장은 기념사에서
한국광복군동지회 이영수 회장은 기념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이 우리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임을 천명하여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강나리 기자]

이날 한국광복군동지회 이영수 회장은 기념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1년 12월 10일 당당하게 대일선전포고를 국제적으로 천명할 수 있었던 것은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기 때문”이라며 “비록 일본군의 조기 투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쉬우나, 우리 광복군은 제일선에 서서 특수임무를 수행할 각오와 의지로 대일전에 참전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 회장은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이 우리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임을 천명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를 대표해 '한국광복군 창군 제78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사진=강나리 기자]
정부를 대표해 '한국광복군 창군 제78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사진=강나리 기자]

정부를 대표해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우리 국군의 정신적 토대인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우리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창설했으며, 창설 이틀 전 대내외에 공표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대임을 선언했다.”며 “이후 광복군은 조직을 갖추어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불굴의 무장 항쟁을 전개했다. 영국군과 연합하여 인도‧미얀마전선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미국의 전략첩보국과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는 등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멈추지 않았다.”고 광복군의 활약을 되새겼다.

피 보훈처장은 “일본군으로 끌려갔던 청년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 광복군으로 입대했다. 광복군은 그 어떤 군대보다 헌신적이고 애국심이 강한 군대였다. 이러한 민족의 군대로서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고 의의를 밝히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가장 어려운 순간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선열들의 거룩한 뜻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도약의 길로 나아가는 시대적 사명에 더욱 정진하자.”고 축사를 전했다.

한국광복군 창군 제78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는 광복회 박유철 회장. [사진=강나리 기자]
한국광복군 창군 제78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는 광복회 박유철 회장. [사진=강나리 기자]

박유철 광복회장은 축사에서 “우리의 광복이 연합군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으로 얻어졌다는 잘못된 인식부터 바로 잡아 선열들의 항쟁이 더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국민이 깨닫게 해야 한다.”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근간이 된 임시정부를 이해하려는 국민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촉구했다.

이어 2부 학술강연회에서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는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어디서 찾아야 하나’를 주제로 국군의 창설과정과 뿌리에 대한 인식, 정신적‧인적‧역사적 근거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관계를 기반으로 강연을 펼쳤다. 한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도 임시정부 계승의식을 갖고, 국군도 한국광복군 계승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6‧25전쟁 당시 3‧8선을 수복해 북진한 날인 1950년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한 현행 기념일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시계방향으로) 한국광복군 창군 제78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120여 명의 시민들이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 김영관 전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의 선창에 따라 만세삼창을 하는 참석자들, 군악대 연주와 3‧1여성동지회 합장단의용진가, 압록강행진곡 합창,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는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어디서 찾아야 하나'를 주제로 학술강연회를 열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시계방향으로) 한국광복군 창군 제78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120여 명의 시민들이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 김영관 전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의 선창에 따라 만세삼창을 하는 참석자들, 군악대 연주와 3‧1여성동지회 합장단의용진가, 압록강행진곡 합창,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는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어디서 찾아야 하나'를 주제로 학술강연회를 열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이날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선창한 김영관(94) 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은 인터뷰에서 “경성사범대(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중 징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1944년 12월 탈출해서 두 달을 걸어 1945년 2월 광복군에 입대했다. 광복군들이 우리를 맞아줄 때 사궤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 이 태극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초심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강서성 상라오 최전선에서 항전했던 김 전 회장은 “당시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을 번안한 곡으로 비장했는데,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본국 침투작전 중 최일선에서 죽겠다고 각오한 우리 마음도 이와 같았다.”고 밝혔다.

한국광복군 창군 78주년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이끈 김영관 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사진=강나리 기자]
한국광복군 창군 78주년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선창한 김영관 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사진=강나리 기자]

그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망국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통한의 역사에서 배워 오늘과 내일에 대비해야한다.”며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919년 임시정부와 수립으로 건국된 것이다. 또 우리가 남북통일을 해야 하는데 국군의 날을 6‧25 동족상잔에서 가져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30년 전 독립기념관 내에 ‘한국광복군선언기념비’를 세운 것이 한국광복군 관련 유일한 기념물이라고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독립운동가 심산김창숙기념관 홍소연 전시실장은 독립운동에 관해 이봉창의사의 의거를 예로 들며 “김구 선생은 1년가량 하와이 교민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금을 모아 의거를 준비했다. 의거 후 20일 만에 일본군이 상해를 쳐들어 올 때 군인 10만 명, 군함 80척, 비행기 800대가 쳐들어 왔다. 우리의 무장력은 상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지만, 힘이 약하다고 나라를 빼앗긴 동안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홍 실장은 “이런 이야기가 젊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자긍심을 주었으면 좋겠다. 어려울 때도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찾기 위해 싸웠다는 것이 공교육 안에서 이야기되지 않다보니 아이들이 잘 알지 못한다. 언론도 젊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전하기 바란다.”고 참석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