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 고조선과 고구려 유적지 답사 5일차의 일정은 숙소인 요양빈관 길 건너 맞은편 요양 백탑을 둘러보고 고구려 중심지인 요양시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먼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동경성과 백암성으로 알려진 연주성산성을 살펴보고 심양시 기반산 풍경구에 있는 고구려 석대자산성을 거쳐 고구려 국내성으로 추정되는 철령시 개원 노성으로 이동하여 숭수사탑과 성터를 답사하는 여정이다.

요양 백탑.  요양 백탑은 금나라 때 건립한 8각 13층 벽돌탑으로 높이가 71미터이고, 역사가 800여년이나 되는 탑이다. 광우사 근처 공원 안에 있다. [사진=민성욱]
요양 백탑. 요양 백탑은 금나라 때 건립한 8각 13층 벽돌탑으로 높이가 71미터이고, 역사가 800여년이나 되는 탑이다. 광우사 근처 공원 안에 있다. [사진=민성욱]

호텔(요양빈관)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출발하기 전까지 여유 시간을 활용하여 길 건너 요양 백탑을 보러 갔다. 요양 백탑은 금나라 때 건립한 8각 13층 벽돌탑으로 높이가 71미터이고, 역사가 800여년이나 되는 탑이다. 광우사 근처 공원 안에 있다. 원래 회칠하여 흰색이었으나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지금은 백탑이 아니라 회색탑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요양 백탑이 울산에도 있다고 한다. 울산시 남구가 요양시와 교류를 통한 우호증진을 위하여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에 ‘중국 요양시 백탑공원’을 축소해서 조성해 놓았다. 또 요양시에는 ‘울산남구공원’이 조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확인은 못하였다.

요양 동경성. 요양 동경성은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사진=민성욱]
요양 동경성. 요양 동경성은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사진=민성욱]

8시30분 호텔을 출발하여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요양 동경성으로 이동하였다. 출발한 지 20여 분만에 동경성에 도착했다. 요양 동경성은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1621 ~ 1625년까지 후금의 수도였다. 이곳 요양은 예로부터 물류교통이 원활한 입지 조건을 갖추어 오랜 기간 남만주 지역의 중심지로서 존재해 왔던 지역이다.

이때 누르하치가 새로운 수도인 동경성을 지을 때 새로 성을 쌓기보다는 기존에 있었던 성을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요양은 후금 이전부터 고구려, 발해, 고려, 요, 금 등 여러 세력이 거쳐 가면서 중요 요충지로 활용하였던 지역이었고, 따라서 기존의 성터를 기반으로 성을 개축하는 것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동경성 전방의 성벽을 자세히 보면 성의 하부기단과 상층부 양식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구려 시대 역사서인 『수서』, 『구당서』, 『신당서』 의 기록과 후대 역사서인 『요사』 등의 기록을 토대로 한 최근 고구려 평양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구려시대 도읍지로서의 평양 천도는 동천왕의 평양성, 장수왕의 평양, 평원왕의 장안성 3번에 걸쳐 이루어 졌다. 동천왕의 평양성은 지금의 환인지역이며, 장수왕의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고, 평원왕의 장안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지로 최소한 한반도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고구려 도읍지는 요동과 만주지역에 있었으며, 동천왕 이후부터 고구려 도읍지는 평양으로 불리며, 패수도 도읍지에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고대 압록강은 압록수라고도 하고 마자수라고도 하는데 모두 지금의 요하를 뜻하며, 평양은 도읍지를, 패수는 도읍지를 흐르는 강을 각각 의미하는 일반명사로 쓰여 졌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연주성산성. 연주성산성은 고구려 백암성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민성욱]
연주성산성. 연주성산성은 고구려 백암성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민성욱]

 

그 외에도 조선시대의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을 중심으로 고구려 평양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488년 윤1월에 제주도로 가다가 난파되어 명나라 해안에 표착한 최부가 기록한 『표해록』과 1712년 최덕중의 『연행록』 을 통해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과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 시의 평양이 현재 요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이전은 조선, 중국 모두 요양을 평양으로 보았다. 소중화를 추구했던 조선이 지금의 북한을 평양이라고 하니 명나라는 요양에도, 조선에도 평양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는 저서 『조선사연구초』 「평양패수고」에서 “지금의 패수인 대동강을 옛날의 패수로 알고, 지금의 평양인 평안남도 중심도시를 옛 평양으로 알면 평양의 역사를 잘못 알 뿐 아니라, 곧 조선의 역사를 잘못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사를 말하려면 평양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태자하. 고구려 백암성으로 알려진 연주성산성 정상에서 내려다 본 태자하(고구려 시대 패수)의 모습.  [사진=민성욱]
태자하. 고구려 백암성으로 알려진 연주성산성 정상에서 내려다 본 태자하(고구려 시대 패수)의 모습. [사진=민성욱]

국경과 중심지는 다르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강역은 요동지역이었다. 요동은 고조선시대 때는 난하의 동쪽이었고, 고구려시대 때는 대릉하 혹은 요하의 동쪽이었다. 고조선의 중심지는 지금의 조양지역이었고, 고구려의 중심지는 요양지역으로 패수에서 배를 타면 낙양까지 가고 한강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 역사 속 평양, 패수, 요수(압록수)는 시대에 따라 다른 곳을 뜻하는데, 이것은 대체로 민족이 기후변화나 전쟁 등의 사유로 거주 지역을 옮기는 경우, 원래 살던 지역의 주거 환경과 닮은 지역을 찾게 되고 그렇게 해서 정착하고 나면 원래 살던 지역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는 동일한 지명이 여러 곳 나오는 것이다.

태자하. 태자하는 연주성산성의 정상과 요양을 관통하여 흐른다. [사진=민성욱]
태자하. 태자하는 연주성산성의 정상과 요양을 관통하여 흐른다. [사진=민성욱]

요양 동경성에서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꿈꾸었던 세상을 상상해 보는 즐거움을 맛보았고 이어 백암성으로 알려진 연주성산성으로 이동하였다. 백암성이라는 명칭은 산성에 사용된 돌이 회백색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체 둘레는 약 2km정도이며 협축식 산성이다. 협축식은 성벽의 양면을 모두 쌓는 방식을 말한다. 고구려 산성이라 치가 여러 곳에 있었고, 굽도리 기단이라는 특징도 있는데 굽도리는 원래 방 안 벽의 아래 부분을 말한다. 성벽에서 지칭할 때는 하부 기단을 일컫는 용어이다. 고구려의 굽도리는 들여쌓기, 기단부에 큰 돌을 사용하기, 그랭이 공법이라는 특징이 있다. 들여쌓기는 돌을 조금씩 안쪽으로 들여서 쌓음으로써 한층 더 안정감을 주고, 기단부에 큰 돌을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하중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그랭이 공법은 자연석이 있으면 제거하지 않고 돌을 자연석에 맞게 다듬어 쌓는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좀 더 밀착감이 크게 작용하는 듯 보였다. 사실 고구려 성벽은 기단부분 중심으로 남아있고 후대에 보축하여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증거가 성벽 위쪽 부분에 있는 회접착 부분으로 명나라 때 보수한 흔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백암성의 동쪽은 절벽, 남쪽은 태자하가 흐르고 있어 천하의 요새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연주성은 백암성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기록에 나오는 대로 1만 명 이상의 군사 주둔지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발굴 결과 사람의 거주지가 안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연주성산성은 고구려 산성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백암성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연주성산성을 오를 때는 잠시 흥분하였다.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 감흥을 이해 못할 것이다. 고구려성으로 그 보존이 잘되어 있는 연주성산성, 동북제일성으로 고구려의 기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산성 정상을 오를 때는 점점 걸음이 빨라지더니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어디서 힘이 나는지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상에 올라 태자하를 내려다보니 내 안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 왔다. 그리고 외쳤다. “고구려 만세, 대한민국 만세, 고구려여, 영원하라.”

석대자산성 표지석. 심양 기반산 풍경구에 있는 고구려 산성인 석대자산성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사진=민성욱]
석대자산성 표지석. 심양 기반산 풍경구에 있는 고구려 산성인 석대자산성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사진=민성욱]

11시 11분에 연주성산성을 출발하여 심양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심양시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1시 26분 고구려산성인 석대자산성((石台子山城)으로 이동하였다. 석대자 산성은 심양시에서 동북쪽으로 20km 떨어진 기반산(棋盘山) 풍경구(風景區 : 관광지) 내에 있는 고구려 유적으로 1987년 심양시 문물조사대가 발견하였다. 기반산 풍경구 입구에 도착하면 대문 양쪽에 커다란 석조물이 보이는데, 한창 바둑을 두고 있는 고대신화에 나오는 여덟 신선 중 이철괴와 여동빈이 사람들을 반긴다. 기반산 명칭은 이 두 신선이 이곳에 와 바둑을 둔 전설에서 유래됐다.

석대자산성은 성벽의 총 둘레가 1,375m, 치가 10개나 되는 보기 드문 산성으로 현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에서 가장 치가 많고, 성의 수구(水口)도 확인할 수 있어 고구려성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산성을 축조할 때 대개 산세가 험준하고 평야와 하천을 낀 수륙교통 요충지를 택했다. 삼면이 산에 둘러싸이고 한쪽으로 물줄기를 향한, 산 아래 동남쪽에 포하(蒲河)강이 흐르고 있는 석대자산성(石台子山城)의 지리적 위치와 지형지모가 이런 고구려산성 여건에 그대로 맞다고 할 수 있겠다. 이곳은 원래 심양시 동릉구 만당향 석대자촌에 속했는데, 이 마을이름도 마을 근처에 높다란 바위돌이 돈대 모양으로 솟아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심양시는 1990년대 두 차례 발굴과정을 거쳐 1998년 막대한 예산을 들여 성벽, 치, 문루 등 석대자산성 일부를 복원하였다. 공사명은 ‘仿建石台子高句麗山城(방건석대자고구려산성)’, 여기서 ‘仿建(방건)’은 중국어로 복원을 의미한다. 이렇게 복원된 석대자산성은 유료 관광지로 운영되다가 중국정부의 개발 불허 방침에 따라 폐쇄되고 출입금지가 되었다. 현재는 복원했던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상태다. 기껏 찾아갔는데,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입구에 있는 표지석에서 기념사진만 촬영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이제 철령지역에 있는 고구려 국내성으로 추정되는 개원 노성으로 이동하였다. 철령시 관할 개원(開原)시는 원나라 때는 開元, 즉 원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 후 명나라 때에 와서 지금의 개원이 되었다. 이러한 고대 개원은 당시 북방교역의 중심지였다.

요하 중류의 왼쪽에 있는 개원노성(开原老城)은 요령성 개원시 노성가에 있다. 명나라 홍무(洪武) 26년이었던 1393년에 지은 개원성은 『개원현지(开原县志)』 따르면 명나라 초에 "옛날 토성의 동남쪽에 벽돌로 쌓아 만든 성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옛날 토성은 원나라 시기에 지어진 개원성(开元城)을 가리킨다. 벽돌로 된 성이 만들어지기 전인 홍무 21년이었던 1388년에 개원로(开原路)의 치소를 함평부(咸平府)로 옮기고, 원(元)을 원(原)으로 고쳐 개원(开原)이 되었다. 명나라가 세워진 후 만들어진 초기 성의 하나로 요북고성(辽北古城)이라고도 불린다.

개원 노성에 있는 숭수사탑. 숭수사 탑은 금나라 정륭(正隆) 원년이었던 1156년에 처음 세웠다.  8각 13층의 밀첨식 벽돌탑으로 탑의 높이는 45.82m이다.[사진=민성욱]
개원 노성에 있는 숭수사탑. 숭수사 탑은 금나라 정륭(正隆) 원년이었던 1156년에 처음 세웠다. 8각 13층의 밀첨식 벽돌탑으로 탑의 높이는 45.82m이다.[사진=민성욱]

개원노성은 한국 고대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장소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천 년도 넘은 기간 동안에 개원노성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여국의 왕성이었다고 한다. 개원노성에 남아 있는 숭수사(崇寿寺) 탑과 종고루(钟鼓楼) 및 성의 남쪽에 흐르는 청하(清河) 등 성의 일부만 둘러 볼 수 있었다.

우선 숭수사(崇寿寺) 탑은 금나라 정륭(正隆) 원년이었던 1156년에 처음 세웠다. 홍리대사(洪理大师)가 열반하자, 화장하여 안치한 부도탑으로 8각 13층의 밀첨식(密檐式, 밀첨이란 말은 '처마가 빽빽하다'라는 뜻으로 탑신이 생략되거나 매우 낮게 처리되어 지붕 부분만 겹겹이 쌓아 올린 것을 가리킨다.) 벽돌탑으로 탑의 높이는 45.82m이다. 중국 내에는 숭수사탑과 비슷한 모양의 불탑들이 다수 존재하는데, 주로 요나라 시대 때 축조되거나 개축한 것이 많아 요탑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형태의 탑은 형태나 규모면에서 두드러졌기 때문에 당시 랜드마크로 역할을 했다. 개원 숭수사탑은 동북지역 요탑의 북방한계로 그 위로는 더 이상 요탑을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숭수사터에 대형 사찰을 건립하고 있었다. 중국정부에서 하는 줄 알았는데 개인이 한다고 해서 놀랐다. 현재 개원시는 새로 조성한 시가지로 신개원이라고 하고, 북쪽 청하(淸河)를 경계로 원 개원이 있는데 개원노성으로 불린다. 이곳이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인 장당경 아사달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한다. 개원노성은 동서남북으로 각 길이가 1km가 넘는 토성이다.

부여촌.  국내성터 인근에 '부여촌(扶余村)'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어 실제 이곳이 부여와 관련된 곳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진=민성욱]
부여촌. 국내성터 인근에 '부여촌(扶余村)'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어 실제 이곳이 부여와 관련된 곳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진=민성욱]

숭수사탑을 보고 중국식 문루인 종고루를 지나 버스에서 내린 곳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천도했다고 하는 국내성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옥수수밭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성벽의 일부가 전부였다. 당시 성 둘레에 폭이 10미터나 되는 해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2~3m되는 작은 수로가 있을 뿐이었다. 설명을 들어 보면 지금은 밭과 주택이 밀집된 곳이지만 고대에는 성 앞까지 물길이 이어져 수많은 배들이 오고 가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통요시에서 생산한 콩 등 작물 등을 배에 싣고 나갔다고 한다. 그야 말로 상상을 통해 2,000년 전 고구려 초기, 동북아 물류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던 국내성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정말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거기서 조금 가다 보니 '부여촌(扶余村)'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어 실제 이곳이 부여와 관련된 곳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중국 내 부여마을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런 후 성 중앙에 위치한 종고루로 다시 왔는데 그 앞에서 노지 수박을 팔고 있었다. 가이드가 수박 한 통을 사서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구려 유적지를 보느라 분주했던 내게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 주었고, 갈증을 해소해 주기에 충분했다. 밖으로 돌아 나오는데 개원 노성의 남문에 해당되는 영은문이 보였다.

고구려시대 때 요수 혹은 압록수에 해당하는 요하, 요하는 큰 두 가지 지류가 있다. 그것이 동요하와 서요하인데 그 두 지류가 만나는 곳이 국내성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시대 국내성은 해상운송의 중심, 경제물류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했다.

오후 6시 50분에 숙소인 철령시 천흥주점에 도착하여, 바로 저녁 식사하러 이동하였다. 일행보다 하루 전에 귀국해야 해서 철령시에서 숙박하지 않고 다른 한 분과 함께 심양시로 개인택시를 불러 이동하였다. 이곳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중국인들하고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간단한 영어조차 못 알아들어 애먹었다. 택시 기사가 창문을 열어 놓아 창 밖에서 거름 냄새와 함께 뜨거운 바람이 택시 안으로 들어왔다. 에어컨을 켜달라고 말을 했지만, 택시 기사가 못 알아들어 결국 만국 공통어인 바디 랭귀지로 그것도 한참만에야 통했다. 숙소인 심양 파사비극빈관(퍼시픽 호텔)에서 승강기가 고장 나 5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승강기가 언제 수리되느냐고 물었는데 그 직원이 영어를 못해 또 바디 랭귀지에다 한자를 써가며 겨우 통했다. 결론은 언제 수리될지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앞으로 중국 여행할 때는 기본적인 중국어는 익히고 가야 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일은 일행과 떨어져서 혼자 심양 시내를 관광할 것이다. 요령성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중국 속 우리 역사와 문화의 자취를 다시 한 번 찾아볼 것이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청나라 심양 고궁을 둘러보면서 경복궁과도 비교해 볼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갈족의 후예인 여진족이 어떻게 중원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관광은 관국지광(觀國之光)의 줄임말이다. 여기서 관(觀)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즉 실체와 진실을 통찰하는 것을 의미하고, 광(光)은 밝고 아름다운 것으로 그 지역이나 그 나라가 갖고 있는 역사적ㆍ문화적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번 중국 내 고조선 및 고구려 유적지 답사 여행을 통해 중국 속 우리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다시 한 번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역사와 문화의 빛, 그 빛을 찾아서 오늘도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