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답사여행 4일차의 일정은 오한국빈관(호텔)을 출발하여 고조선 유적지로 추정되는 성자산 산성과 조양(조양 남·북탑), 고구려 건국지로 추정되는 북진묘(의무려산)를 거쳐 요동지역 고인돌 유적 중 대표적인 유적 중 하나인 해성 석목성 고인돌 유적을 돌아보고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요양으로 입성한 후 숙소인 요양빈관(호텔)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성자산 정상에는 고조선 유적지로 추정되는 원형 제단터가 있다. [사진=민성욱]
성자산 정상에는 고조선 유적지로 추정되는 원형 제단터가 있다. [사진=민성욱]

이날 새벽 3시에 숙소를 출발하여 답사일정을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찾은 성자산 산성은 전날 갔던 삼좌점 석성 유적과 함께 고조선 유적지로 추정되는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지이다. 산 위 정상에 축조된 옛 성이 있다고 해서 성자산(城子山)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성자산 산성은 이곳말고도 길림지역에 두 군데 더 있다. 발해의 초기 건국지로 알려진 동모산, 즉 돈화시 성자산 산성이 있고, 고구려 산성 유적지이자 발해 중경의 위성으로 알려진 연길시 성자산 산성이 있다.

우리가 가기로 한 성자산 산성은 요령성 능원시 삼관전자촌에서 동북쪽으로 3Km 떨어진 뒷산 위에 있다. 이 성은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가 함께 존재하는 복합유적이다. 이 석성 인근에는 홍산문화 유적인 우하량 유적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성자산 산성에서도 최근 우하량이나 삼좌점 석성 유적에서 발견되는 천문 관측 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답사단은 흥분되어, 해가 뜨기 전에 올라가서 추정된 관측지점에서 관측 가능 여부를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적봉시 오한기 박물관장의 도움으로 새벽에 성자산 산성으로 출발했다. 박물관이 제공한 승용차 3대에 나누어 탔다. 이동시간이 제법 길었다. 비포장도로도 꽤 달렸다. 한참 가다보니 어슴푸레 산 같은 것이 보였다. 산 아래에 건물이 하나 있었고, 표지석이 보였다. 표지석 앞에는 ‘성자산 유지’라고 적혀 있고, 표지석 뒤에는 긴 설명글과 함께 기원 전 2,000년경에 쌓은 석성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성자산 정상에서 본 일출. [사진=민성욱]
성자산 정상에서 본 일출. [사진=민성욱]

해가 떠오르기 전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산 정상을 향해 걸었다. 산 위에 올라가니 석성을 쌓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많은 적석총과 하늘과 조상신들에게 제사를 지낸 제단 터와 건물 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4000년 전 해발 860미터에 둘레 5만 평의 산성 유적이라니 세월의 깊이에 놀라고 규모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이 정도 규모의 산성을 쌓으려면 국가 단계에 진입한 사회조직이 있어야 한다.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이 정도 규모의 성을 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축성 연대가 4,000년 전이라면 고조선시대와 비슷하다. 돌 쌓는 행위는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이것이 고구려로도 이어졌다.

조양탑은 요나라 이전부터 존재했고 요나라 때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조양북탑은 중국동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 이 지역의 관광명승지가 되었다. [사진=민성욱]
조양탑은 요나라 이전부터 존재했고 요나라 때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조양북탑은 중국동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 이 지역의 관광명승지가 되었다. [사진=민성욱]

성터는 크게 3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기준점이 되는 제단이 1단, 하지점, 춘추분점, 동지점 주위에 2단, 아래로 내려가서 3단이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천문관측 기준점인 남북 기준을 먼저 맞추고 둘레에 동지점, 하지점, 춘분·추분점과 일몰점 등을 확인하였다. 확인된 지점에 돌을 세워 표시해 놓았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4시 40분이 되자 6월 하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한 지점에서 해가 떠올랐다.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다. 천문관측점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지평선 너머 해가 고개를 밀고 올라 왔다. 태양이 솟아오르며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경이롭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태양을 숭배했고 하늘의 섭리대로 살았던 고대 한민족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성자산에 오른 것은 유물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조선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주위 환경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4000년 전 이곳 성자산은 현재의 성자산과 환경이 달랐을 것이다. 산 정상 부근에서 샘터도 두 군데 발견되었다고 한다. 샘터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비교적 평평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동심원 형태의 몽고인들 무덤 터도 보였으며,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매장한 경우 등 유구들이 많이 발견되지만 시대를 추정하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여튼 이곳 성자산은 고금을 막론하고 신성한 곳임은 틀림이 없다. 이곳에 고천문학을 연구할 수 있는 천문대를 설치해도 좋을 것 같았다.

중국 조양시에 있는 조양 남탑. [사진=민성욱]
중국 조양시에 있는 조양 남탑. [사진=민성욱]

전날 삼좌점 석성과 오늘 성자산 산성까지 이어진 유적지 답사로 두 석성 유적지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하였다. 또한 이들 유적을 만든 이들의 문화전통은 분명 고구려, 발해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 전통의 흔적은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졌고 유구한 우리 역사와 함께 했을 것이다. 이번 답사단의 여정은 그 머나먼 세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아니었을까.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패랭이꽃도 보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꿩, 산토끼, 그리고 나귀와 망아지를 보니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7시 2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의무려산으로 이동하였다. 9시 5분에 조양시에 도착했다. 우선 조양 남탑을 보고 북탑으로 뻗어 있는 일주대로를 따라 걸었다. 조양 남·북탑은 이전에 보았던 요탑과 비슷해 보였다. 방형의 13층 전탑이었다. 영성현에서 보았던 탑은 팔각형의 13층 전탑이었다. 조양탑은 요나라 이전부터 존재했고 요나라 때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조양북탑은 중국동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 이 지역의 관광명승지가 되었다. 이곳 조양은 조선이라는 지명의 태생지이기도 하다.

이동 중에 평양 연구의 내용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고구려 평양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었고, 한성백제의 한성이 지금의 평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이 가능하다면 우리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국내성이 지금의 집안에 존재하지 않았고 개원 쪽에 있었으며, 고구려의 건국지로 알려져 있었던 오녀산성은 동천왕 때 천도한 곳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하대학교 평양연구팀에서 연구한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 교과서의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상식도 바뀔 날도 멀지 않아 보였다.

의무려산 앞에 있는 북진묘. [사진=민성욱]
의무려산 앞에 있는 북진묘. [사진=민성욱]

 

점심때가 되어서야 북진시에 도착했다. 청나라 황제가 고향 갈 때 반드시 들렸다가 간 곳이 의무려산 북진묘로 일종의 행궁지였다. 북진에서 나란히 서있는 쌍탑을 만날 수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지인 흘승골성의 위치가 요 동경성(요양)에서 서쪽으로 이틀거리에 있고, 그곳에서 10~20km 더 가면 요택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고구려 건국지인 흘승골성 및 졸본성이 본계시 환인지역에 있는 오녀산성이 아니라 이곳 의무려산이 있는 북진묘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 황제 순행길에 들렸던 행궁지, 청나라와 명나라 비석이 있으며, 청나라 비석에는 의무려산이 태백산이라고 되어 있다. 요택이라고 해서 진흙 밭이 있었고 한마디로 늪지였다. 북진묘 뒤에 의무려산이 있고, 그 산을 넘으면 평지였다. 요택은 7,000~8,000년 전에는 바다였다고 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해성시에 있는 고인돌을 보기 위하여 이동하는 중에 소나기를 만났다. 소나기를 잠시 피하기 위해 다리 밑에 버스를 세워 놓고 기다렸다. 다리 밑에는 좌판이 깔려 있었다. 인근 밭에서 수확한 수박, 참외 등과 삶은 옥수수를 팔았다. 인심 좋은 가이드가 수박을 한 통 사 와서 나누어 주었다. 참외도 맛이 좋았다. 옥수수 역시 쫀득하고 찰진 것이 맛이 있었다.

고조선시대에 축조된 해성 석목성 석붕(고인돌). 중국에서는 고인돌을 석붕이라 한다. [사진=민성욱]
고조선시대에 축조된 해성 석목성 석붕(고인돌). 중국에서는 고인돌을 석붕이라 한다. [사진=민성욱]

소나기가 멈추어서 다시 고인돌로 향했다. 해성시 석목성 고인돌이었다. 지형학자의 설명으로는 고인돌 덮개돌은 화강암, 좌측은 편마암이라고 했다. 3000년 전 청동기시대, 인근에 있는 바위산에서 판석을 떼어 옮겨 놓았다고 한다. 실제 인근에 바위산이 있었고, 떼어낸 흔적이 보였다. 떼어내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어떻게 운반해 왔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했다. 고인돌은 높은 언덕 위에서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1기만이 동향으로 서 있으며, 암벽에 많은 성혈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단순 무덤은 아니고 하늘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낸 제단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개주 지역 석붕산 고인돌과도 유사한 형태라고 한다. 답사단 일행 중 고인돌 전문가가 해주는 고인돌 관련 강의가 유익했다.

해성시 석목성 고인돌.  지형학자의 설명으로는 3000년 전 청동기시대, 인근에 있는 바위산에서 판석을 떼어 옮겨 놓았다고 한다. [사진=민성욱]
해성시 석목성 고인돌. 지형학자의 설명으로는 3000년 전 청동기시대, 인근에 있는 바위산에서 판석을 떼어 옮겨 놓았다고 한다. [사진=민성욱]

 

중국에서는 고인돌을 석붕(石棚)이라고 한다. 북한 평양 관산리 고인돌이 세계 최대 탁자식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지석묘라고도 한다. 해성 석목성 고인돌 밑에 있는 밭에 고인돌 하나 더 있었다. 석주식 고인돌은 기둥과 같이 고임돌이 4개가 있다. 이러한 고인돌은 우리나라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도네시아도 셀 수 없이 많은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 지금도 고인돌 만든다고 한다. 무덤에 온 재산을 쓰고 장례가 끝나면 거지가 된다고 한다. 요즈음은 고인돌을 시멘트로도 만든다고 한다.

고인돌과 청동검은 고조선의 지표 유물이다. 이러한 고인돌이 요하를 넘어서 서쪽에는 없다. 요하 서쪽은 양질의 돌이 없다고 한다. 또한 구멍이 있다고 해서 모두 별자리는 아니다. 때로는 풍년이나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서 구멍을 내기도 하였다. 물론 다수의 구멍이 나온 것은 별자리로 볼 수 있다. 일본에서도 고인돌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고인돌은 한국에서 왔다고 인정한다. 고인돌 유적만 보면 청동기 시대 동아시아의 중심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고인돌은 지배자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일반 평민도 고인돌을 사용했다. 고인돌 크기가 지배자의 세력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작은 고인돌에서도 지배자의 상징인 청동검이 나온다고 한다. 탁자식 고인돌의 기본 전형은 4면이 막혀져 있었다. 2면 내지 3면을 먼저 세워 놓고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이러한 고인돌은 금주와 개주 석붕산 고인돌 그리고 이곳 해성 석목성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이제 고구려 중심지인 요양으로 이동하였다. 요양이 다가오자 그 옛날 고구려인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뛰었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 발해 3대 문왕이 천도했던 중경현덕부, 그 뒤 요, 금, 원으로 이어지면서 만주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요양에 입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