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9월 2일, 서울역 광장에서 65세의 한 노인이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 위해 그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그 주인공인 강우규 의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 의거 제99주년 기념식’이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 앞에서 개최됐다.
 

지난 2일,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 앞에서 열린 왈우 강우규 의사 의거 제99주년 기념식에서 참가자들이 만세삼창을 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지난 2일,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 앞에서 열린 왈우 강우규 의사 의거 제99주년 기념식에서 참가자들이 만세삼창을 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사단법인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김중양 이북5도위원회 평안남도지사, 나종화 광복회 부회장 그리고, 장원호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한 기념사업회 회원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장원호 기념사업회장은 “최근 요동치는 한반도와 국제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은 번영과 자유의 초석인 애국심을 바로 세워 중심을 잡아야 한다. 대일항쟁기 시절, 고령의 나이에도 민족의 독립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극단의 결정을 한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기억하고 그 마음을 느껴보길 바란다.”며 인사말을 전했다.
 

장원호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장이 지난 2일, 강우규 의사 의거 제99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장원호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장이 지난 2일, 강우규 의사 의거 제99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은 기념사를 통해 “강우규 의사의 의거로 울려 퍼진 폭탄의 굉음만큼 나라사랑의 울림이 민족의 가슴 속에 전해질 수 있었다. 그 울림이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계승되어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지난 2일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앞에서 열린 강우규 의사 제99주년 기념식에서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지난 2일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앞에서 열린 강우규 의사 제99주년 기념식에서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민석 기자]

나종화 광복회 부회장은 “99년 전 오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거사를 결행한 강우규 의사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본다.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의지를 온 천하에 알리며, 일제의 오금을 저리게 한 강우규 의사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기념사를 밝혔다. 이후 참가자들은 만세삼창으로 독립운동가의 뜨거운 마음을 느껴보고, 나라사랑의식을 되새겼다.

한편,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난 강우규 의사는 청소년기 시절,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다. 이후 1883년 함경남도 흥원으로 이주한 그는 한약방을 경영하며 인술(仁術)을 베풀고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우며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 [사진=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 [사진=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하지만 국운이 계속 기울면서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맞이하고, 강우규 의사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우리나라와 민족을 영구히 식민지화하기 위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하는 술수를 꾀했다. 3.1운동을 계기로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강우규 의사는 당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들어진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의 단원이었으며, 박은식, 김치보 등과 의논해 의거를 결심하게 되었다.

비록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의 처단은 실패했지만, 당시 일본 경찰과 일본군 장교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전달했다. 강우규 의사는 의거 후 가까스로 피신했지만 친일파 경찰 김태석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하다 재판을 받고 이듬해 1920년 11월 29일에 순국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한독립의 의지를 세계 만방에 천명한 강우규 의사의 의거와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은 민족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 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