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국학원은 지난 14일, 서울시청 지하2층 바스락홀에서 제181회 국민강좌를 개최했다. 이번 강좌에서는 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이 ‘정조문과 교토 고려미술관’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은 지난 14일 서울시청 바스락홀에서 열린 국학원 제181회 국민강좌에서 '정조문과 교토 고려미술관'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은 지난 14일 서울시청 바스락홀에서 열린 국학원 제181회 국민강좌에서 '정조문과 교토 고려미술관'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정조문 선생은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어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문화유산을 되찾으려는 했던 인물이다. 주로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계통적으로 모은 도자기류를 수집했으며, 회화류나 불상 및 금속 공예품, 목공예품 등을 모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켰다.

최선일 위원은 이날 강연에서 정조문 선생의 인생사에 관하여 설명했다. 그는 “정 선생은 1918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유년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다. 교토에서 작은 가게를 열어 사업을 시작한 그는 선술집, 고깃집, 초밥집, 찻집 등을 개업하며 자신의 사업을 확장해갔다.”고 운을 띄웠다.

수많은 문화재들을 수집했던 정조문 선생은 어떤 계기로 문화재 수집을 시작했을까? 최 위원은 “우연히 교토 고미술거리를 돌아다니던 정 선생은 아무 그림도 그려지지 않고 채색도 없는 곡선만이 아름답게 강조된 조선백자를 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많던 조선백자 항아리는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정 선생은 이후로 고려와 조선의 고미술품 수집에 열정을 불태웠다.”고 설명했다.

최 위원에 따르면 “당시 정 선생은 일본에서 자랑거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자신의 조국, 조선의 항아리가 고미술 상점에서는 가장 높은 가격으로 제일 좋은 곳에 진열된 것이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또한, “정 선생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 '일본 속의 조선'을 동포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조선의 자랑스러움을 전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고미술을 취급하는 교토와 오사카 골동품상은 물론이고, 일본 전국의 고미술 상점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지난 14일 열린 제181회 국민강좌에는 시민 30여 명이 참석해 강의를 경청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지난 14일 열린 제181회 국민강좌에는 시민 30여 명이 참석해 강의를 경청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정조문 선생은 일본에서 자신의 조국이 분단되는 것을 보며 남북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통일이 될 때까지 고향을 방문하지 않겠다며 고국에 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생활하던 교토에 미술관을 세웠는데 최 위원에 따르면 “교토는 일본 문화의 중심지이자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해서 이곳에서 한국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어했다.”고 설명했다.

정 선생은 그렇게 1988년 일본 교토에 ‘고려미술관’을 세우게 되었다. ‘고려미술관’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최선일 위원은 “남한의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뛰어 넘어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고려’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미술관에는 정조문 선생이 40년 이상 일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개인 자산으로 구입한 잃어버린 우리 문화재 1,700점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미술관 안내 책자에서 정조문 선생은 이와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국제인이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조선이나 한국의 풍토 속에서 성숙한 아름다움은 이곳 일본에서도 언어, 사상, 이념을 넘어 이야기합니다. 부디 차분히 그 소리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최선일 위원은 “비록 유년기를 제외하면 고국 땅을 밟아 본 적이 없지만, 타국에서 조선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정조문 선생을 기억해 달라. 교토를 방문하게 되면 고려미술관에 들러 고국의 성숙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우리의 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주면 감사하겠다”며 강의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