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의 태양은 뜨거웠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그것 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고조선 및 고구려 유적지 답사단이 구성되었고, 중국 동북지역에 존재하는 고조선과 고구려 유적지를 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뜨거운 여름을 견뎌 내었다. 우리 역사의 첫 출발점이자 민족의 뿌리 역사를 담고 있는 고조선의 중심지와 그 땅에서 다물이라고 하여 고조선의 영토뿐만 아니라 천하의 중심이라는 천하관까지 물려받고자 했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교과서에서 배운 지금의 북한 평양과는 거리가 먼 여정이었다. 그 동안 많은 학자가 연구한 결과, 우리 역사의 시ㆍ공간이 제대로 밝혀지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왜곡되었거나 상실된 우리 역사들이 차츰 회복되고 복원되고 있다. 

그 동안의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역사지리연구를 토대로 실제 그 역사가 존재했던 공간으로 찾아가 시대를 거슬러 시간과 공간이라는 좌표에 정점을 찍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남다른 감회와 느낌이 있었다. 답사단에는 고고학 전문가, 지형학 전문가, 고인돌 전문가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토론과 강의가 이어졌다. 답사 1일차는 중국 톈진빈하이공항에 도착해서 육로로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현으로 이동하였고, 갈석산을 둘러 본 후 진황도시에 있는 노룡두를 거쳐 산해관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톈진공항에 도착해서 받은 톈진의 첫 인상은 중국의 최대 공업도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시 외곽지역은 특히 그렇게 보였다. 곳곳의 입간판을 보면서 공산주의 국가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외제차들을 수 없이 많이 보았다. 확인해 보니 벤츠 등 중국 내 현지공장이 세워졌고 현지공장에서 생산된 외제차들이 중국 도로를 활보하고 있던 것이다.

하늘의 나루터인 톈진(天津)은 그렇게 지나갔고, 발해만 연안 도로를 타고 갈석산으로 향했다. 하북성 창려현을 들어가기 위하여 톨게이트에 들어섰는데, 톨게이트 이름이 昌黎東(창려동)으로 되어 있고 영문으로는 East Changli Toll Gate로 되어 있었다. 창려현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얼마간 이동하다 보니 드디어 저 멀리 갈석산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볼 때는 설악산 같이 보였고, 점점 다가가니까 북한산처럼 보였다. 그 만큼 친근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갈석산은 북경 근처 하북성 창려현, 난하 하류 동부유역에 위치한 산이다. 이 갈석산은 고조선 이후 한사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산이다. 이 산이 고조선과 관련하려 중요시 되는 것은 이 지역이 고조선 영토의 경계지역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며, 이곳은 산해관과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타민족과의 경계로 인식해 왔던 지역이다.

갈석산 입구. [사진=민성욱]
갈석산 입구. [사진=민성욱]

  날이 더워 산에 오르지는 않았고 입구에서 갈석산을 감상했다. 입구에서 올려다 본 갈석산은 가히‘신악갈석(神岳碣石)’이라고 할만 했다. 병풍을 두르듯 암벽이 턱하니 앞에 버티고 서있는 느낌이었다. 입구에는 역대 중국 황제들이 갈석산에 오른 기록이 담에 부착되어 있었다. 중국 황제 중 갈석산에 가장 처음 오른 사람은 역시나 진시황이었다. 진시황 이후 한무제, 조조, 수양제, 당태종 등이 그 뒤를 이어 갈석산에 올랐다. 갈석산 동쪽을 정벌하고 오른 황제도 있었지만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호된 시련을 겪고 올랐던 황제들도 있었다. 갈석산 입구에 걸려 있는 현수막의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10개의 글자가 걸려 있었다.

  游碣石神岳(유갈석신악) 观碧海靑山(관벽해청산)
  즉 신이 내린 큰 산, 갈석산에 올라 푸른 바다와 푸른 산을 바라본다.

  갈석산은 695미터의 높지 않은 산임에도 중국의 역대 제왕들이 갈석신악(碣石神岳)이라며 중시하였는데, 그것은 발해만을 굽어보는 평야지대에 불쑥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위압감을 주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즉 황제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가 하면 진흥왕이 신라영토를 확장하면서 세운 순수비처럼 중국 황제들이 그들의 땅이 동쪽으로 어디까지인지 확인코자 순행 길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서쪽을 바라보면서 광활한 그들의 영토에 만족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동쪽을 바라보며 고조선과 고구려 땅을 침범하려 했을 것이다.

원나라 이전 중국 한족과의 경계는 갈석산이었다. 조조가 지금의 조양지역에 있었던 오환을 무너뜨리고 회군하는 길에 갈석산을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는 바다와 바위가 맞물려 있었다. 갈석산 앞의 갈양호, 고대에는 창해, 즉 바다였을 것이다. 바다 한 가운데 비석처럼 서 있다고 해서 그 이름도 갈석이다. 발해만 연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솟아 있었던 갈석산은 고대인들에게는 랜드마크이자 등대와 같았던 곳이다. 현재  위치는 현 하북성 창려현, 갈석산은 현 요하 동쪽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당대와 후대의 기록들이 말해 주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지금의 요서지역을 들어서려면 반드시 갈석산을 넘어야 했다. 갈석산 앞은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 간다면 갈석산을 넘거나 갈석산을 우회해서 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갈석산 주변에 바다가 안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대략 6세기 중엽 이후 수심이 얕은 갈석산 앞의 근해에 황하가 운반해 온 토사가 쌓여 지금과 같은 육지가 형성되면서 자연히 바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그 후로는 더 이상 갈석산에서 바다를 감상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갈석산은 하나의 산이라기보다는 큰 산맥과 같았다. 산이 높고 험준했다. 암벽으로 되어 있어 그 이름도 갈석산이다. 예로부터 산 이름에 악이나 석이 들어가면 상당히 험준한 산이었다. 국내에도 설악산, 치악산, 월악산 등 험준한 산에 악자가 들어가 있다. 정말 그 산을 오르면 악 소리 나온다.

그래서 고대인에게는 갈석산이 자연스럽게 경계가 되었다. 민족과 문화의 경계가 그것이다. 갈석산을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마치 후대에 의무려산을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로 구분되듯이 말이다.물론 요동과 요서의 구분이 되는 기준은 요수, 즉 요하이다. 고조선 시대의 요수는 지금 난하였다. 난하의 동쪽이 요동이었다. 고구려 시대는 지금의 요하가 그 경계가 되었다. 즉 요하의 동쪽이 요동이었다.
이러한 자연의 경계들로 인하여 민족이 나누어지고, 문화가 달랐으며 결국 다른 역사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경험들이 모여 역사가 되었다. 즉 경험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경험이 개인의 역사가 되듯, 한 집단, 한 민족의 경험치가 모여서 민족을 이루고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서로 다른 역사를 써 왔던 것이다.
결국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역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특정 시대의 역사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집단과 개인의 경험치가 오랜 세월 축적이 되고 그것을 후대가 학습을 통해 발전시키는 과정,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역사가 되어 준 것이다. 또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이기도 했던 갈석, 갈석산은 진(秦)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요동 땅은 고구려의 요람이었다.

  갈석산 줄기가 백두대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으로 갈석산 입구에 피어있는 무궁화를 보았다.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던 갈석산, 그 입구에서 만나는 무궁화는 분명 달랐다. 무궁화가 달랐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느낌이 달랐다. 지역에 따라서 무궁화 종류가 다르고 생태조건이나 환경도 달랐을 것이다. 무궁화의 또 다른 이름이 진달래가 아니었을까? 고조선 시대, 학문과 무예를 갈고 닦았던 국자랑이 있었고, 그 국자랑은 머리 위에 천지화를 꽂고 다녀서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천지화를 무궁화라고도 하고 진달래라고도 한다. 봄 되면 우리나라 산하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이 진달래다. 불현 듯 무궁화의 다른 이름이 진달래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김소월님의 진달래꽃 시 구절이 생각났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꽃, 그 진달래꽃을 보면 가족 생각이 나고 사랑하는 연인이 더 그리워진다. 그것은 바로 역사를 공유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정서가 아닐까. 

이어서 진황도시 산해관구에 도착했다. 먼저 맞이한 건물은 산해관 중국 장성예술관이었다. 산해관에 들어서면 자주 만날 수 있는 문구가 있다.

“산해관경구 천하제일관”
 
중국인들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문구다. 천하의 중심이라는 그들의 사고, 우리도 그러한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 최소한 고조선과 고구려시대에는 말이다.

산해관 야경. [사진=민성욱]
산해관 야경. [사진=민성욱]

 산과 바다 사이에 있다고 해서 산해관이라고 했고, 과거에는 임유관이라고도 불렀다. 산해관은 명나라 때 장성의 동단이었다. 산해관에서 멀지 않은 노룡두를 먼저 갔다. 장성의 끝단이 마치 늙은 용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그 노룡두 주변에는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었다. 해수욕장 한쪽 끝에 노룡두가 있는데 철조망이 쳐져 있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항구와 공단이 공존하는 곳, 그곳은 장성의 끝이자 출발점이었다.

노룡두를 보고나서 산해관 내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 입구에도 무궁화가 피어 있었다. 갈석산과 산해관에서 만난 무궁화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애국가 중 후렴 부분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떠올랐다. 한반도 안에서는 어디서 재더라도 삼천리가 안 된다. 이곳 갈석산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한반도로 넘어와 백두대간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래야 무궁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삼천리 화려강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명나라 말기 농민의 반란인 이자성의 난이 일어났다.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하고, 황제 숭정제가 자결하자 산해관에서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향했던 오삼계 장군은 다시 회군했으며, 처음에는 이자성에 투항할 의사도 있었지만 이자성이 그의 아버지와 애첩을 잡아가자 철옹성인 중국 북방 수비관문을 청군에게 열어주게 된다. 청군은 쉽게 북경을 함락하고 명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 이후 산해관은 북방 수비관문으로서의 역할은 약화되었다.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에게 중원의 자리를 내준 중국은 현대에 이르러 다민족통일국가론을 체계화하고 완성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생존전략이었다.

갈석산은 자연경계이고, 산해관은 인위적으로 만든 경계이다. 이러한 경계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갈석산과 산해관은 인접해 있었고, 기록상으로 고조선의 서쪽 경계에 해당되는 곳이며, 중국 한족들이 타민족과의 경계로 여겼던 곳으로 당시 고조선의 강역이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강역은 민족의 강역이 되고, 그 이후 한사군의 위치도,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공간도 그곳과 관련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