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1주기 추모식이 7월 19일(목) 서울 강북구 소재 여운형 선생의 묘소에서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이부영) 주관으로 열렸다.

이날 추모식은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기념사업회원, 유족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식사, 내빈 추모사, 봉도가에 이어 유족 인사와 헌화, 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은 ‘몽양선생님 꿈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추모식사에서 “선생께서 좌우연합을 성사시키려 할 때 우리 민초들이 걸었다가 선생이 흉탄에 쓰러지면서 사라졌던 그 희망이 차츰 자라고 있는 것을 본다”며 “그 희망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이유는 남북 양쪽이 서로에 키우고 있는 신뢰와 진정성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1주기 추모식이  19일 서울 강북구 소재 여운형 선생의 묘소에서 열렸다. [사진=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1주기 추모식이 19일 서울 강북구 소재 여운형 선생의 묘소에서 열렸다. [사진=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은 “평창올림픽은 물론이고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이 서로에 대해서 보인 신뢰와 배려의 진정성이 남북관계의 기본자세가 되어야 하겠다”며 “남북의 진정성 있는 상호신뢰가 주변국들의 자세도 따라서 변화시키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부영 이사장은 “옛말에 옛 것을 헤아리고 새 것을 배운다(溫故而知新)고 했다. 몽양 선생이 미리 보여준셨던 지혜와 용기의 가르침을 오늘의 정세에 맞춰 다시 적용되도록 하겠다”고 추모식사를 마무리했다.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1885. 4. 24~1947. 7. 19)은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아버지 여정현(呂鼎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李)씨가 치마폭에 태양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훗날 몽양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몽양은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1908년에는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10년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1918년 상해에서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우리들 소식’을 발행하였으며, 8월에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총무로 활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크게 부각하기 위해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촉발케 하였다. 또한, 국내에는 김철, 선우혁 등을 파견하여 국내인사와 접촉하게 하고, 자신도 간도, 시베리아 방면으로 가서 3․1만세운동의 분위기를 진작해 나갔다.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1주기를 맞아 19일(목) 서울 강북구 소재 여운형 선생의 묘소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 등이 분향, 헌화하고 있다. [사진=몽양여운영선생기념사업회]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1주기를 맞아 19일(목) 서울 강북구 소재 여운형 선생의 묘소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 등이 분향, 헌화하고 있다. [사진=몽양여운영선생기념사업회]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에 가서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몽양은 1920년 조국의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하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국의 독립을 역설하였고, 10월에는 상해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 아래 백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여 군사 투쟁을 준비하였다.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의 재편 문제가 부상하자,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였고,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들어와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1933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서울 강북구 소재 여운영 선생 묘소에서 19일 열린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1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서울 강북구 소재 여운영 선생 묘소에서 19일 열린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1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몽양은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조국광복을 준비하였고, 광복 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실패하고 극좌, 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극우파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상향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