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 쌍릉 중 대왕릉에서 발굴된 인골이 신라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장안에 서동요를 퍼트렸다는 설화 속 주인공인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 이하 연구소)은 지난 4월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인골을 정밀 분석한 결과 신체 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으로 볼 때 7세기 초‧중반 사망한 큰 키의 노년 남성일 것으로 확인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8일 익산 쌍릉 인골을 정밀조사한 결과, 백제 무왕의 인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사진=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8일 익산 쌍릉 인골을 정밀조사한 결과, 백제 무왕의 인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사진=문화재청]

 이 인골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8월부터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 사업의 하나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시와 함께 쌍릉 발굴조사를 진행하던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석실 끝부분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나무상자 속에 인골 조각 102개가 담겨 있었다. 1917년 조선총독부가 단 며칠 만에 쌍릉(대왕릉)을 발굴하여 다른 유물을 유출하면서 이 인골 상자는 꺼내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

쌍릉이 처음 언급된 기록은 '고려사’이며, 고려 충숙왕 때(1327년) 도굴되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조선총독부는 1917년 발굴 당시 백제 말기 왕릉 또는 그에 상당한 자의 능묘라고 확인했지만, 1920년 고적조사보고서에는 13줄의 내용과 사진 2장 도면 2장만 공식기록으로 남겼다.

연구소는 이번에 인골을 분석함으로써 무덤 주인을 밝혀 백제 무왕의 능인지 결정지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고고학과 유전학, 법의인류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분석했다.

분석결과 키는 161cm에서 최대 170.1cm로 최소 50대 이상 60~70대 노년층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조선시대 남성의 평균 키가 161.1cm인 것을 고려하면 비교적 큰 키이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에 관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표현되어 있다.

인골의 목 울대뼈의 갑상연골에 골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골반 뼈 결합면의 표면이 거칠며, 작은 구멍이 많고 불규칙한 결절이 있는 점으로 보아 노년층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가속 질량분석기(AMS)를 이용한 정강뼈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보정연대가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되었다. 그러므로 인골의 주인은 7세기 초중반 경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시계방향으로)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위치한 쌍릉 중 대왕릉, 소왕릉은 180m 떨어져 있다. 쌍릉 석실내부와 발견된 목제 유골함.  발견된 목제 유골함 내부의 인골 파편 102점. [사진=문화재청]
(시계방향으로)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위치한 쌍릉 중 대왕릉. 소왕릉은 180m 떨어져 있다. 쌍릉 석실내부와 발견된 목제 유골함. 발견된 목제 유골함 내부의 인골 파편 102점. [사진=문화재청]

정밀 분석결과는 인골의 주인공이 백제 무왕일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우선 백제 무왕은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10대 또는 20대에 즉위한 경우 무왕의 사망나이가 남성 노년층으로, 쌍릉의 인골 추정 나이와 비슷하다. 또한 사망 시점이 7세기 초반부터 중반 즈음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는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한 걸음 더 보여준다.

이외에도 인골의 주인공은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과 다리 및 무릎의 통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옆구리 아래 골반 뼈에 숫자 1모양으로 골절된 흔적이 있는데 이는 낙상 등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추출한 콜라겐탄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에 의하면 벼와 보리, 콩 등을 많이 섭취했으며,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는 어패류 등 단백질 섭취 가능성도 보인다.

그동안 쌍릉은 백제 말기의 왕릉급 무덤으로, 백제 30대 무왕의 무덤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했으며, 또 다른 학설로는 고조선 준왕이라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인골 분석결과는 백제 무왕일 가능성을 뒷받침할 근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