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서거일을 맞아 7월 14일 오전 11시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호법 영웅 일성(一醒) 이준 열사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이 봉행됐다.

이날 사단법인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 봉행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추념제전은 고두병 사단법인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의 사회로 국민의례, 유족대표인 조근송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의 인사말, 열사 생애보고, 추념사 등으로 진행되었다.

추모제전 국민의례 .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서거일을 맞아 14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호법 영웅 일성(一醒) 이준 열사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이 봉행됐다. [사진=정유철 기자]
추모제전 국민의례.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서거일을 맞아 14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호법 영웅 일성(一醒) 이준 열사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이 봉행됐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준열사기념사업회 김영기 이사는 ‘이준 열사의 어록’ 가운데 일부 골라 '열사가 남기신 말씀’을 낭독하여 숙연하게 하였다. 이준 열사는 이런 말씀을 남겼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며,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조국의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자신 있는 마음은 천만 개의 대포보다 강한 것이다. 자신 있는 마음은 위대한 인물이 되는 일대 조건이라 하겠다.”

김영기 이사는 마지막으로 이준 열사가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에 가까운 이들에게 준 시(詩)를 소개했다.

“헤이그 밀사로 갔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게 되면/ 어느 누가 청산에 와서 술잔 부어놓고 울어주려나// 바람 눈 서리도 언 자리에서 내가 죽은 뒤에/ 누구라도 장차 좋은 술 가져다가 청산에서 울어주려나// 가을바람 쓸쓸한데 물조차 차구나/대장부 한번 가면 어찌 다시 돌아오리”

추모공연으로 이상수 오공선 선사의 천부경 낭독, 이정민 한강수예술제보존회 대표의 '천부경 천무', 조재현 (한강수예술단) 씨의 '헌무-진혼무'의 공연이 이어졌다. 임순화 시인이 ‘임의 영전에 다짐하는 오늘입니다’라는 추모 헌시를 낭송하고, 이준열사기념사업회 홍보대사인 송별이가 추모의 노래 '우리는 지구인' '통일이 온다'를 불렀다.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서거일을 맞아 7월 14일 오전 11시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열린 호법 영웅 일성(一醒) 이준 열사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에서 참석자들이 분향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서거일을 맞아 7월 14일 오전 11시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열린 호법 영웅 일성(一醒) 이준 열사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에서 참석자들이 분향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는 누구인가. 제111추모제전에서 보고한 ‘이준 열사의 생애보고’에 따르면 일성 이준 열사는 1859년 음력 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구 종산리) 발영동에서 부친 이병권,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이준 열사는 태조 이성계의 백형인 이원계(李元桂)를 시조로 하여 그로부터 제18세손이 된다. 처음 이름은 성재(性在), 그 후 향시를 보게 되었을 때 이름을 선재(璿在)로 고쳤다가 나중에 준(儁)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아호도 해사, 청로, 해옥으로 했다가 나중에 일성(一醒)으로 고쳤다.

열사가 세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작고하여, 어린 시절을 조부 명섭(命燮)과 숙부 병하(秉夏)에게서 자랐다. 여섯 살 때부터 조부와 숙부에게서 글을 배웠고 12세인 1870년 북청읍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될 우수한 답안을 작성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장원으로 뽑지 않았다. 이에 그 답안을 찾아 대중 앞에서 낭독하였고 그때 한학자 주만복(朱萬福)이 감탄하여 자기의 장녀와 결혼하게 하였다. 주씨 부인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서거일을 맞아 7월 14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열린 호법 영웅 일성(一醒) 이준 열사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에서 조재현 (한강수예술단)씨가 '진혼무'를 추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서거일을 맞아 7월 14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열린 호법 영웅 일성(一醒) 이준 열사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에서 조재현 (한강수예술단)씨가 '진혼무'를 추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1875년 상경하여 대원군을 만나게 되었고 이때 대원군은 열사의 인물됨에 탄복하여 김병시(金炳始) 대감에게 천거하였다. 김병시도 또한 열사의 영준한 탁견을 높이 사 자신의 사저에서 수학하도록 주선하였다. 이곳에서 열사는 당대의 석학, 정객과 광범하게 교유하며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경륜을 넓혔다.

29세에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북청 향리로 돌아와 초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인 고종 25년 30세 때 2000평의 사재 토지를 희사하여 경학원(經學院)을 세워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학원은 뒤에 북청 공립농업학교로 발전했다. 1894년 이준 열사는 함흥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조모 경순왕후의 능인 순릉(純陵)의 참봉직을 맡아 봉직하였다. 1895년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으나 부패한 관리들과 마찰을 빚어 모함을 받아 출사한 지 33일 만에 면관되었다.

미관말직에서는 나라의 정치풍토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한 이준 열사는 당시 신사조를 부르짖던 서재필, 박영효, 이상재 등과 함께 민권운동을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1896년 서재필, 이승만,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평의장에 취임하여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서재필, 이승만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가두연설을 통해 국민계몽을 해나가다 반대파의 모략이 거세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14일 열린 호법 영웅 일성(一醒) 이준 열사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에서 이준열사기념사업회홍보대사 송별이가 '우리는 지구인' '통일이 온다'를 불렀다. [사진=정유철 기자]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14일 열린 호법 영웅 일성(一醒) 이준 열사 순국 111주년 추념제전에서 이준열사기념사업회 홍보대사 송별이가 '우리는 지구인' '통일이 온다'를 불렀다. [사진=정유철 기자]

1898년 40세에 이준 열사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귀국하여 독립협회에 다시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이를 만민공동회로 개편하고 배일(排日)저항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준 열사는 나쁜 정치 탄핵 가두연설를 하여 이승만, 이동녕 등 17인과 함께 투옥되었다.

1902년 44세 때 민영환, 이상재, 이용익, 이동휘 등과 함께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04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으려 하자 대한보안회를 조직하여 이를 막기 위한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보안회가 칙령으로 해산되자 다시 대한협동회를 조직, 회장으로 당선된 후 악전고투하여 일본 공사로부터 황지문권을 되찾아 황제에게 바쳤다. 친일매국 집단인 일진회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 맞서 만인공진의 뜻으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맡아 친일파 대신들이 일삼는 가혹한 징세와 재물 약취 등의 비리를 탄핵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항일투쟁과정에서 간신들의 모함에 빠져 체포된 뒤 일방적인 재판으로 3년의 형을 선고받고 황주(黃州)의 고도(孤島)로 정배되었다. 

1905년 민영환, 이용익 등의 주선으로 고도에서 석방된 이준 열사는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다시 항일국민운동을 추진해 나아갔다. 1906년 48세 때 이준 열사는 만국청년회 회장에 취임하여 국제친선운동을 전개하였고, 정부에 ‘국정 구폐 진언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국민교육회’ 회장에 재선되어 이동휘, 이갑, 안창호, 유근, 유정수, 유승겸, 홍재기 등과 국민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보광학교의 야학과 같은 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

이준 열사는 한북흥학회 회장으로 서우학회와 합동하여 ‘서북흥학회’를 발족하고, 이갑, 안창호, 이종호 등과 교육사업에 총력 집중하면서 서북흥학회를 모태로 ‘오성학교’(지금의 건국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광신상업중고등학교’를 세웠다. 그해 법안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이를 확대하여 이면우, 홍재기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해 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에 평리원 검사를 거쳐 곧 특별법원 검사에 취임하였으며 인재등용론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1907년 49세에 안창호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안중근의 요청으로 진남포의 삼흥학교에서 애국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 해 이준 열사는 친일파이자 탐관오리인 이하영, 김낙현을 고발, 공개재판에서 준엄하게 그 죄상을 추궁하였다. 4월에는 국채보상연합회 회장에 취임하여 국채보상의 절대 필요성을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자강회 주최로 종로 YMCA에서 ‘생존경쟁’이란 제하의 연설을 통하여 국민에게 경각심을 불어 일으켰다. 이 해에 ‘한국혼 부활론’을 지었다.

이 무렵 이준 열사는 고종황제로부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밀명을 받고 이상설, 이위종 두 특사와 함께 헤이그로 갔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호소하고 1907년 7월 14일 자결함으로써 순국하였다. 

1962년 정부는 이준 열사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 9월 30일 헤이그를 출발한 열사의 유해가 일본을 경유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한 후 종로구 낙원동 건국대학교에 설치된 빈소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10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을 거행하고, 수유리 장지에 안장됐다. 1964년 서울 장충단에 열사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 헤이그 묘소에 열사의 흉상과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994년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이준 열사를 1995년도 이달(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2001년 5월 25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동문회에서 이준 열사에게 ‘자랑스런 서울법대인 상’을 추서했다.

이준 열사는 35세인 1895년 서울에서 평동 이씨 일정(一貞)과 결혼하였다. 남편과 17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던 이일정 여사는 평생 면관과 유배, 감옥 생활과 태형 등으로 고달픈 인생행로를 걷는 이준 열사의 반려자이자 동지가 되었다. 이일정 여사는 집을 팔아 서울의 안국동에 안현부인상점을 개점하여 청렴한 이준 열사를 도왔고, 이준 열사가 감옥에 들어가면 가두집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침체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신문에 격문을 기고하는 등 여러 가지로 활동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업인이자 여성 운동가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