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의 서거 제74주기를 기리는 ‘만해 추모제'가 6월 29일(금)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AW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재)선학원(이사장 법진)이 주관한 이날 행사는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한 각계인사, 유족,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사, 헌화, 추모 공연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은 추모사에서 "한 세기 전 한용운 선생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몸소 실천하여 가르쳐 주신 애국애족의 정신은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여 온 국민이 화합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며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시고, 앞장서신 만해 선생님의 고귀한 뜻을 이어가는 것은 미래세대에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물려는 길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이신 만해 한용운 선생님!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가 선생님의 가르침의 뜻을 되새겨보며, 우리가 나아갈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원했다.

만해 한용운 서거 74주기 추모제.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의 서거 제74주년을 기리는 ‘만해 추모제가’  29일  서울 종로구 AW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사진=김경아 기자]
만해 한용운 서거 74주기 추모제.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의 서거 제74주년을 기리는 ‘만해 추모제가’ 29일 서울 종로구 AW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사진=김경아 기자]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년(고종16)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오늘날 그는 법명과 법호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생전에 자신의 작품 등에 애용하였기 때문이다.

 만해는 어려서 동학농민운동과 의병활동 등을 목격하면서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08년 그는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京城明進測量講習所)를 세우고, 소장에 취임하였다. 이는 일제의 침략마수가 본격적으로 미쳐 오자 이에 대응하여 개인과 사찰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고자 하였던 것이라 전한다.

  1910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박탈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ㆍ격려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유랑하였다. 1911년 가을 한용운은 우리 동포를 만나 망국의 설움을 서로 달래고 조국의 장래를 논의하고자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동포들에게 고국의 사정을 전하고, 박은식, 이시영, 윤세복 등의 민족지사들과 만나 목자 잃은 양떼 같은 동포를 보호할 방법을 상의하였다.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서거 74주년 추모제에서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방청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서거 74주년 추모제에서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방청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그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가 선생님의 가르침의 뜻을 되새겨보며, 우리가 나아갈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원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일제의 첩자로 오인하여 그를 미행하던 독립군이 숲이 우거져 대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 굴라재라는 고개에서 몇 발의 사격을 가하였던 것이다. 거의 죽기 직전에, 정신을 차려 피를 흘리며 인가를 찾았다. 다행히 중국인의 도움으로 대강 상처를 수습한 뒤 동포들의 마을로 와 달포 동안 치료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총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그는 평생을 체머리(요두증)를 흔들며 지내야 했다.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하였고 1914년에는『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였으며,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 잡지『유심(惟心)』을 발간하며 민중계몽운동과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 3월 1일, 만해를 포함한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일경에 체포되었다. 만해는 이로 인해 징역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는 등 저항 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경성지회장을 맡았다. 『님의 침묵』은 그를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시인, 최대의 시민문인이자 저항시인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그는 불교개혁을 통한 사회개혁, 독립투쟁 등의 행동을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나 독일의 반나치스문학보다 한 차원 승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하여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만해는 지금의 성북동집 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당호의 집을 짓고 입적 때까지 줄곧 여기에서 여생을 보낸다. 심우장이란 당호는 만해가 손수 지은 것으로 소를 찾는다는 뜻인데 소를 마음에 비유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해 수양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민족이 나은 위대한 승려이자 저항시인이며, 독립투사였던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열망하던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입적하고 말았다. 만해의 지기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그의 영결식에 즈음하여 그를 추모하는 시를 썼다. 

풍란화 매운 향기
님에게야 견줄손가
인라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 위 없으니 혼자 돌아오소서.

만해의 노년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도 꼿꼿한 지조와 절개가 빛나는 '풍란화의 매운 향내' 바로 그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