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에 중국 북경에서 태어났고, 올해로 여든두 해째 인생을 살고 있다. 조찬 모임이 없는 날엔 어김없이 아침 8시 50분이면 사무실에 출근한다. 국학원 고문으로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매주 수요일에는 친구들을 불러 기체조와 명상수련도 함께 한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기자에서 재무부 대변인으로, 금융기관 임원과 카이스트 연구위원으로 평생을 쉼 없이 일했다.

신문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국학원을 만나서 바뀐 인생 후반기가 오늘까지라고 말한다. 언제나 서두름이 없고 지나침이 없고 치우침이 없다. 항상 건강하고 반듯하고 너그럽다. 중심을 갖춘 어르신의 지혜가 절로 우러나와 주위의 귀감이 된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많은 이들의 멘토가 되어주고 있는 장준봉 국학원 고문(전 경향신문사 사장)을 만나 인생 후반기를 사는 지혜를 들어본다.

장준봉 국학원 고문은 국학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2004년 충남 천안에 국학원 전당이 개원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장준봉 국학원 고문은 국학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2004년 충남 천안에 국학원 전당이 개원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 우리나라 평균수명을 넘기고 계신데요.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신문사 사장에서 물러났을 때가 2002년이고 햇수로 16년이 지났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몸이 건강하고 좋아요. 그때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님과 골프를 하던 중에 다리가 좀 안 좋다고 했더니 발끝치기를 권하셨어요. 처음에는 100번, 200번도 힘들었는데, 500번을 넘기니까 쉬워지고 1천 번도 하겠더라고. 그래서 매일 1천 번씩 하다가, 2천 번, 3천 번으로 늘렸어요. 그동안 안경도 벗었고, 발끝치기 건강모델로 방송에도 출연했지요.

몇 년 전부터 총장님이 알려 준 배꼽힐링도 하루 1천 번씩 해서 장(腸)도 건강해졌어요. 얼굴색이 달라졌다고 친구들이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부터 약골이었고, 장교시험에 합격하고 신체검사 때 떨어질까 봐 걱정할 정도였는데, 80세가 넘어서 이렇게 자신 있게 건강을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과 6.25 전쟁의 와중에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아버님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셔서 북경에서 태어났습니다. 4남 1녀 중에 차남으로. 해방 직후에 신의주로 내려와서 1년 살다가 서울로 와서 돈암동에 자리를 잡았어요.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가까운 학교에는 4학년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광화문에 있는 협성국민학교를 다녔어요. 독립운동가가 세운 사립학교였는데, 6.25 전쟁 때 피난 다녀왔더니 없어졌어요.

국민학교 다니면서 쉬는 시간에 학교 판매부에서 학용품 파는 일을 했어요. 하교할 때 광화문에서 신문 20부를 사서 돈암동까지 걷고 뛰면서 사람들에게 신문을 팔면서 집으로 왔어요. 신문 판돈으로 집안 살림에 보태고 학비로도 쓰고 그랬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는 못 들어갔어요. 장남인 형님만 진학하고. 혜화동에 있는 자동차 정비소와 자동차 부품상점에 취직해서 일했어요. 그러다 6.25 전쟁이 터졌어요. 피난을 대전으로 가서 1년간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가서 2년간 피난 생활을 했어요. 부산에서도 신문 배달과 봉투 만드는 일을 해서 집안 살림을 도왔어요. 그때 다른 친구들은 피난 와서도 학교에 다녔는데, 나는 그 전에 학교를 다녔다는 증명서가 없어 편입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 친구들의 권유로 영수학원에 다녔는데 영어와 수학은 중학교 3년 과정을 한 과목에 3개월씩 1년 만에 마쳤어요. 국어와 역사, 한문은 책을 사서 집에서 독학했고요.

▶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공부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네요.

예, 그러다 이북에서 피난 온 친구와 사귀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권유로 숭문중고등학교 부산 분교에 응시해서 고등학교 1학년 과정에 합격했어요. 실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합격은 기뻤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등록금을 낼 엄두를 못 내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가 세들어 살던 병원 원장 사모님이 등록금 30만 환 중에 10만 환을 보태주셨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새벽 6시에 병원 복도와 사무실을 청소했는데 그걸 예쁘게 보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20만 환이 부족해서 사정해 보기로 하고 학교에 무작정 갔어요. 한 달 뒤에 20만 환을 갚겠다고 애원을 했어요. 그때 한 선생님이 중학교 졸업장이 없지만, 입학성적이 우수하다고 책임져 주시겠다고 해서 입학을 할 수 있었어요.

학교생활이 길지 못했어요. 얼마 안 있어 휴전되고 학교가 서울로 환도해서 친구들은 다 서울로 갔어요. 나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이듬해까지 부산에 있다가, 뒤늦게 혼자 상경하여 복학하려 했지만 밀린 수업료 때문에 다닐 수가 없었어요. 우연히 친구를 만나 자취방에 신세를 지면서 함께 미국 공보원 도서실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때 숭문고에 입학을 시켜 주셨던 선생님을 만났는데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정을 듣고 다른 선생님 앞으로 저의 딱한 사정을 편지로 써 주셨어요. 그 선생님으로부터 사연을 들은 교장 선생님은 밀린 수업료는 면제해 주는 대신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의 명예를 높이라고 하시며 편입을 허락해 주셨어요. 교장 선생님과 두 분 선생님은 제 평생의 은인이세요. 세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지만 제 마음속에는 늘 감사함으로 남아 계십니다.

 

▶ 대학을 졸업하고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셨네요.

어느 대학을 갈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육군사관학교에 가면 학비 없이 다닐 수 있다고 해서 그리로 마음을 정하려고 하는데, 서울법전(서울법대 전신) 출신인 교장 선생님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가라고 하셨어요. 학교의 명예를 높이라고 하신 말씀도 있고, 대학 들어가면 학비 마련할 방도가 다 생긴다고 하셔서 서울대에 들어갔어요. 대학등록금이 3만 환이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생 10명을 그룹 지도를 해서 한 달에 5만 환씩 벌었어요. 그 걸로 집안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 보태느라 대학 생활도 제대로 못 했어요. 공군장교로 재직하면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여 형님과 함께 힘을 모아서 처음으로 우리 집을 샀어요. 해방 이듬해에 서울에 와서 꼭 12년 만이었어요.

당시 사법고시는 1년에 10여명 정도 뽑아서 하늘의 별 따기였어요. 계속 돈을 벌어야 하니 고시에 몰두할 엄두는 못 내고, 기자는 국어, 영어만 잘하면 합격할 수 있다고 해서 기자시험을 봤어요. 한국일보 시험일이 제일 먼저라서 시험을 봤는데, 1차, 2차 합격하고 면접만 남겨두고 있었어요. 한국일보 기자 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들어 온 법대 및 공군 후배가 한국일보에 난 합격자 명단을 보고 전화를 했어요. 형은 몸도 약한데 왜 조간신문에 가려고 하냐며, 석간인 경향신문에 가라고 했어요. 100: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건데 아깝긴 했지만, 평소 신뢰하던 후배의 말이 맞는 거야. 그래서 한국일보 포기하고 경향신문사에 시험을 쳐서 합격했어요.

▶ 기자로 일하다가 어떻게 재무부 대변인으로 가셨어요?

재무부로 갈 생각은 없었어요. 신문사에서 처음에 기자 수습기간이 끝난 후 간부회의에서 희망부서를 묻는데 외신부라고 했더니 모두 웃는 거예요. 외신부는 영문으로 된 통신 팩스 받아서 번역해야 하니까 다들 안 가려고 했어요. 나는 외신부로 가면 해외특파원으로 나갈 수 있는 줄 알았어요. 선배가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못 들었던 거지. 외신부에 2년간 근무하는 동안 국제경제 관계기사를 많이 쓰니까 경제부에 발탁이 되었고, 경제를 잘 아는 기자가 정치부에 필요하다고 해서 정치부에 발령되었어요. 정치부에서 2년간 일하던 중 다시 경제부로 발령이 났고 뒤에 부장까지 승진했어요. 그렇게 해서 13년간 기자 생활을 했어요.

경제부 차장으로 상공부(지금의 산자부)에 출입할 때 대변인 제도가 생기자 장관이 대변인으로 오라고 제의했어요. 대변인은 부장 정도 한 사람이 가야 하지 않느냐고 정중하게 거절했어요. 그 후 부장으로 재직 때 재무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그때 재무부 장관이 대학 선배여서 거절할 수가 없어서, 대변인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그때 이야기하자고 하고 회사로 돌아왔어요. 근데 재무부에서 내가 대변인으로 오기로 했다고 발표해서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여기서 재무부로 안 가면 재무부도 이상해지고, 기자들 사이에서도 내가 이상하게 되겠구나 해서 가게 되었어요. 1977년에서 1984년까지 7년 동안 장관이 여섯 분이나 바뀌는 가운데 재무부 대변인을 했어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 초반은 정치적으로 아주 민감했던 시기여서 단명한 고위 공무원이 많았는데, 나는 그 시기에도 정치적 격랑과는 무관하게 장수한 대변인이었어요.

장준봉 국학원 상임 고문은 지나온 인생을 돌아볼 때 한마디로 홍익생활을 해왔다고 회고했다. 장 고문은 120살까지 살겠다는 마음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기계발을 계속 하려 한다고 말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장준봉 국학원 상임 고문은 지나온 인생을 돌아볼 때 한마디로 홍익생활을 해왔다고 회고했다. 장 고문은 120살까지 살겠다는 마음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기계발을 계속 하려 한다고 말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 그 이후에는 금융권에서 일하셨지요?

당시는 재무부에 있다가 은행으로 많이 갔는데, 국민은행 전무로 가라고 해요. 전무는 너무 부담스럽고 과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사가 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이번에는 외환은행 감사 자리가 났다고 가라고 했어요. 감사도 부담스럽기는 전무나 마찬가지여서 사양하고 대신 다른 사람이 감사가 되고 나는 이사로 갔어요. 외환은행에서 이사로 있다가 같은 계열인 외환리스금융, 외환투자자문의 대표이사 사장을 하고, 그 후에도 몇 군데 금융회사 대표이사를 했어요. 1990년대 말에 고려석유화학 부회장을 하고, 이어 카이스트 연구위원으로 일했어요. 당시 카이스트에 금융공학과가 있어서 금융관련 경험자가 필요해 자문을 했어요.

▶ 어떻게 다시 경향신문사로 돌아오시게 되었나요?

경향신문사 사장 공모가 났는데, 누가 나도 모르게 추천을 했대요. 31명이 추천되었다니 내가 될 가능성은 없을 테니까 신경을 안 썼어요. 근데 여러 가지 심사를 해서 11명을 추렸는데 내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거기서 4명을 추렸는데 또 들어갔다고 하면서 와서 프레젠테이션 하라는 겁니다. 카이스트에서도 계속 있기를 바라서 안 가겠다고 했더니 프레젠테이션만 하라고 해서 할 수 없이 가서 했어요.

그 다음 날 신문기자협회에서 기자가 전화해서 내가 경향신문사 사장 후보로 선정이 되었다고 축하 인사를 했어요. 얼마 후에 취임식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다시 경향신문사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신문사가 경영이 몹시 어려워서 경영 개선에 집중했어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문사에 돌아가서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보람입니다.

▶ 그때 국학원 설립자인 이승헌 총장님과 인연이 시작되셨지요?

당시 경향신문에서 이승헌 총장님의 미국 활동을 취재했고, 국내에서 큰 국제행사 때면 신문사가 후원도 하여 축사하러 가서 몇 번 뵈었어요. 총장님에 관해서는 우리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정신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하는 분이구나 하는 정도로 알았어요.

그런데 신문사 사장을 2년 하고 퇴임을 결정했을 무렵, 총장님이 연락하셔서 만나 뵙게 되었어요. 국학원을 설립할 계획인데 행정원장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더 적당한 분이 있지 않을까 해서 고민했는데, 총장님은 내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것에 마음을 두셨던 것 같아요. 그때 원장(학술원장)을 맡기로 하신 분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제가 2002년에 국학원 원장으로 취임해서 3년 5개월을 일하고, 그 후로 국학원 상임고문으로 오늘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어요.

지난 18년 동안 내가 지켜본 이 총장님은 한결같은 분이에요. 연배는 나보다 젊지만, 품은 뜻과 철학 그리고 40년간 이루어 온 업적을 보면 참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총장님 같은 분이 우리나라에 계셔서 참 다행이고 복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렇게 우리 민족의 국학과 홍익정신을 살리고, 세계에 전파하는 어려운 일을 나서서 하겠습니까? 사명감이 없이는, 대범하지 않고는 엄두도 못 낼 일이예요.

▶ 국학원 원장으로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2003년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했어요. 국민 100만 명에게서 서명을 받고, 유네스코와 이코모스에도 고구려 유산이 우리 것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알렸지요. 그 후로도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항해 우리 역사 지킴이로 국학원이 나서서 일했습니다.

2004년에 충남 천안 흑성산에 국학원 전당이 개원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한국의 정신과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바르게 알려줄 교육문화의 전당이 생긴 거지요. 그 뒤로 100만이 넘는 학생, 공무원, 군인, 시민이 국학원을 다녀갔습니다.

국학원이 그동안 매년 3대 국경일 (개천절, 삼일절, 광복절)의 진정한 의미를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축제를 전국적으로 개최해 왔어요.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지역이나 계층, 종교와 사상적 대립이나 갈등보다 공존과 상생의 가치를 더 중요시하게 된 데는 국학원의 홍익정신 교육이 이바지한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밖에 국학원 발족과 함께 국민강좌와 학술회의를 개설하여 일반 국민에게 우리역사에 관한 의식을 제고하는 데 기여해 오고 있습니다.

장준봉 국학원 고문은 매일 발끝치기, 배꼽힐링을 하며 만보 이상 걸으며 120세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장준봉 국학원 고문은 매일 발끝치기, 배꼽힐링을 하며 만보 이상 걸으며 120세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 지나온 인생을 돌아볼 때 추구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인성’이었던 것 같아요. 남한테 싫은 소리 안 하고, 베풀 수 있으면 베풀려고 하고, 의리를 지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부족한 점이 많지만 한마디로 홍익생활을 하는 거예요. 나는 가장 중요한 도(道)가 생활 속의 도라고 생각해요.

이 총장님 말씀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건강과 행복과 평화는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알아봤더니 대학 친구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났어요. 동기생들은 내가 제일 건강하다고 말해요. 아버지는 독립운동 때 다친 상처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76세까지 사셨어요. 내가 지금 82세인데, 총장님과 국학원에서 처음 만난 60대보다 더 정신적 및 신체적으로 건강해지고 좋아졌으니까 자급자족이 되는 셈이지요. 하하.

▶ 100세가 멀지 않으신데 앞으로 인생에 대한 계획은?

이 총장님이 작년에 쓰신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를 보니까, 몸(身)수련도 중요하지만 마음(心)수련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많이 베풀고 홍익정신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요새 그런 쪽에 신경을 많이 쓰고, 더 많이 이해하고 마음을 크게 쓰려고 노력해요. 나도 120살까지 살겠다는 마음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기계발을 계속하려고 해요.

이 총장님과의 만남이 나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고, 국학원에 와서 나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어요. 앞으로도 이러한 삶으로 10년, 20년을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매일 아침에 출근할 때, 하루에 만보 이상을 걸으면서 내 삶은 홍익이라는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만으로 감사하지요.

▶ 18년 전에 경향신문사 사장실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한결같이 성실하고 여유로운 삶은 중심을 바르게 세우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120세의 꿈을 꼭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