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권대한 씨는 벤자민인성영재학교 멘토 후원단 부회장이다. 그에게는 마음껏 공부할 수 없었던 힘든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힘든 청년기를 보냈다. 그런 그가 40대 후반까지 마음껏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고, 청소년들의 성장과 진로를 돕는 멘토를 하고 있다. ‘선택하면 이루어진다’는 꿈을 이루는 법칙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늘도 새로운 선택과 새로운 약속을 자신과 세상을 향해 하고 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권대한 벤자민인성영재학교 멘토 후원단 부회장은 5년 전부터 청소년 멘티의 성장과 진로선택을 돕는 멘토를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권대한 벤자민인성영재학교 멘토 후원단 부회장은 5년 전부터 청소년 멘티의 성장과 진로선택을 돕는 멘토를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어땠습니까?

소백산 자락의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정말 경치가 좋았어요. 산으로 들로 다니며 뛰어 놀고 강이 있었고, 4계절을 마음껏 자연 속에서 놀 수 있었어요. 소 먹이러 가서 소 풀어놓고 산에서 열매도 따 먹으며 낭만적이고 순수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물론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야 하는 힘든 점도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담배농사를 지었는데 여름에 일이 많습니다. 밭에서 진득진득한 진이 나오는 담뱃잎을 따서는 숨도 못 쉬고 안고 나옵니다. 그리고 수레에 실어 가지고 와서 엮어서 건조실에 말려요. 밤새도록 엮고 건조실에서 사다리를 타고 담배를 올려두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요즘은 기계로 하지만 그때는 수작업으로 했어요. 아버지는 담뱃잎을 건조하는 석탄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밤새 불 관리를 하셨어요. 나중에 구공탄이 나와서 좀 나아졌어요. 지금도 농사일이라고 하면 고생스럽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 학창시절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까?

대학을 가고 싶어서 고등학교 인문계를 다녔어요. 생물학자가 꿈이었어요. 그러다 3학년 때 해양대학교 시험을 보러 갔는데, 시력이 안 좋아서 떨어졌어요. 시골이어서 신체검사 조건도 모르고 시험을 보러 갔던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재수를 하게 되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서예를 해서 미대 서예학과를 가려고 했어요. 가난해서 미술교습비를 댈 수가 없어서 학원을 하는 선배 밑에서 몇 달 배우고 서예로 결정했어요.

갑자기 그해 겨울에 어머니가 심장병 진단을 받은 데다, 시청에서 환경미화원을 하시는 아버지 월급으로는 저를 대학 보낼 형편이 안 되셨어요. 그래서 대학은 포기하고 서울에 있는 고모부 공장으로 일하러 갔어요. 낮에는 염색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혼자서 공무원시험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다음해 1월에 어머니의 심장병이 오진이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집에 내려와서 어머니 곁에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다가 군대 갔습니다.

▶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 그대로 살았네요.

군대를 다녀와서도 공무원 시험공부를 했습니다. 처음 본 시험에 떨어지고, 두 번째는 친구와 함께 시험 보러 갔는데, 대구경북이 함께 시험을 보는데 경북은 시험장소가 대구가 아니고 구미였어요. 그런데 대구 시험장으로 갔어요. 이미 택시를 타고 구미에 가도 시험을 볼 수 없었어요. 동대구역에서 친구와 캔 맥주를 마시면서 괴로워했습니다. 타이밍도 안 맞고, 인생이 계속 안 풀리는 겁니다.

그해 추석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가리봉동 여인숙에서 친구 3명과 지내면서, 건설현장에 일하러 다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남았습니다. 한 명은 대학에 복학하고, 한 명은 다리를 다쳐서 고향에 내려갔어요. 저도 공사장에서 큰 못에 찔려서 일을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군대 친구가 일하던 식당을 소개받아서 잠자리도 해결하고 요리 일을 배웠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니까 사장이 잘 봐서 급여를 올려주고 했는데 주방 실장이 만류했답니다. 제가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 실장이 제대로 본 겁니다.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치려면 법을 알아야 하는데 혼자 공부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를 들어갔는데,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생회 활동과 학생운동을 했어요. 공무원 시험 준비는 제쳐두고요.

▶ 30대에는 인생의 꿈을 찾고 펼치기 시작했습니까?

29살에 대학 졸업하고, 30살에 결혼했어요. 결혼하면서 한국장례업협동조합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2000년대여서 화장 문화가 활발하던 때였어요. 당시에 거친 사람들이 그 업계에 많았는데, 1년치 월급도 못 받고 일했어요. 힘들어서 그만두고, 구 생활체육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에 월드컵 응원 관련된 일도 하고, 서울시 한마당 체육대회도 기획했어요. 그때 회장님이 사학재단의 이사장님이었는데, 저를 학교로 오라고 했어요.

근데 제가 받아들이지 않자 2년 동안 하던 생활체육국장을 내려놓게 해서, 구 장애인 복지관으로 옮겨 가게 되었어요. 근데 그곳도 오래 있을 곳이 아니어서, 밀린 월급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장례조합을 다시 갔어요. 물론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죠. 그러던 중에 재단 이사장님이 제가 고생하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했어요. 이번에는 제가 고개 숙이고 들어갔지요.

권대한 벤자민인성영재학교 멘토 후원단 부회장은 수년 전 우연히 접한 ‘한국인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통해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사진=김경아 기자]
권대한 벤자민인성영재학교 멘토 후원단 부회장은 수년 전 우연히 접한 ‘한국인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통해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사진=김경아 기자]

 

▶ 직업체험박람회 같은 인생의 전환을 만들어준 계기는요?

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면서 프로젝트 기획을 했습니다. 그러다 단학을 만났습니다. 이사장 비서실에 근무하는 여자 직원이 점심시간에 자리를 좀 봐달라고 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했어요. 근데 그 직원의 책상에 <한국인에게 고함>책이 있었어요. 그냥 절로 손이 가서 펼쳐보고 머리말 읽고 완전히 빠져 버렸어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주위에서 죽음을 많이 접해서, 왜 사는지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었어요. 점심시간에 도시락도 안 먹고 운동장에 나가서 먼 산 바라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고민을 들어준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책에서 답을 찾으려고 책을 많이 읽었지만 찾지 못했어요.

근데 20년 만에 그 답을 책 한 페이지에서 찾은 거예요. 물 만난 물고기 같았어요.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 직원을 붙잡고, “이 책의 저자가 살아 계시냐?”“어디가면 만날 수 있냐?”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소개받은 곳이 단월드 상계센터였고, 몇 개월 수련을 열심히 하다가 큰 행사에서 먼발치에서 이승헌 총장님을 뵈었어요. 갑자기 어린 시절 헤어진 부모님을 만난 듯한 마음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어요. 그때가 36세였습니다. 제 인생은 그 전후로 나뉩니다.

▶ 인생의 방향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제가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알게 되면서, 삶의 목적을 ‘완성’으로 정했어요. 평생 홍익하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부터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유아용품을 만드는 회사인데 그중 유모차 커버는 틈새시장이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꿈과 희망을 주고요. 회사의 수익금으로 홍익을 위해 기부도 하고요.

저는 항상 홍익기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명상수련을 하고 함께 사회적으로 활동을 하는 직원도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사장과 직원이지만, 밖에 나가면 어깨를 나란히 일하는 홍익활동가입니다. 그러다보니 직장에서도 주인의식과 동료의식을 갖고 함께 일하게 됩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홍익을 실천하는 다양한 활동을 해 왔어요. 국학운동과 국학교육도 하고, 생활체육 국학기공 활동 등 많은 활동을 해 왔습니다. 이전에는 직업도 여러 번 바뀌고 삶의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제가 홍익정신을 갖고서는 사업도, 홍익활동도 모두 일관성 있게 하고 있습니다.

▶ 벤자민인성영재학교 멘토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저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했습니다. 벤자민학교 멘토제도는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이’라는 생각으로 확장해 주었습니다. 모든 어른이 이런 생각만 갖는다면 대한민국의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첫 멘티인 1기 양성훈 군을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성훈이가 “홍익대통령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길래 1주일간 고민했습니다.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나이부터 알려주고, 현실정치에 관해서 설명해 줬어요. 영민한 학생이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겠다고 했어요. 그 뒤로 2기, 3기, 4기 멘토 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과 청년시절에 힘들었기 때문에 꿈과 비전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 멘토 강연의 주제는 ‘꿈을 찾는 멘토링’입니다. 벤자민학교 서울학습관과 부산학습관에서 강연을 했고, 전체 워크숍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멘토 후원단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 벤자민인성영재학교 멘토로 활동하면서 어떤 점이 좋았습니까?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때는 제가 남의 인생을 멘토 할 자격이 되는지를 고민했어요. 하지만 1기 학생들을 멘토링하면서, 오히려 제가 학생들에게서 멘토링을 받는 경우도 있었어요. 열심히 살아가고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인성영재들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제게 감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연을 할 때는 이야기합니다. 멘토인지 멘티인지 모르겠지만 벤자민학교 멘토를 하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벤자민학교의 멘토와 멘티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멘토와 멘티가 되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게 가장 감동이었습니다.

권대한 벤자민인성영재학교 멘토 후원단 부회장은 삶의 목적을 '완성'에 두고,  홍익하면서 살기로 했다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사진=김경아 기자]
권대한 벤자민인성영재학교 멘토 후원단 부회장은 삶의 목적을 '완성'에 두고, 홍익하면서 살기로 했다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사진=김경아 기자]

 

▶ 지금도 공부를 하는데, 어떤 목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까?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에서 뇌교육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지구경영학과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습니다. 석박사 과정을 하는 이유는 홍익실천을 좀더 전문적으로 하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다니는 대학원의 뇌교육학과와 지구경영학과 석박사 과정은 세계유일의 학과여서, 선구자적인 마음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업과 활동으로 일정이 바쁘지만 토요일에는 대학원에서 수업 듣고 원우들과 만나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냅니다. 작년에는 대학원 원우회 회장을 했습니다.

저는 홍익정치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고 싶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는 서양 정치입니다. 화합이 아니라 이분법적인 대립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단군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정치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논문을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치모델을 만들어 외국에 소개하는 그런 일을 앞으로 하고 싶습니다.

▶ 앞으로 인생 설계를 물어봐도 될까요?

저희 세대는 관리만 잘하면 100세는 무난할 것 같고, 120세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곧 50세가 되는데, 앞으로 그간의 경험을 살려서 정치 분야에서 홍익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70세가 넘으면 공동체마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사회복지와도 연결되고 선도문화와도 연결되는 공동체, 홍익마을을 함께 만들어 보고 싶어요. 하지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인생설계는 제 인생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제 양심이 허락하고, 제 양심에 따르는 일을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