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암 장영주 화백. 올해 72세인 화백은 오는 8월 프랑스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21년 만에 다시 화필을 잡은 장 화백은 지난해 미국 유학을 다녀오는 등 갓 등단한 화가처럼 작품에 열정을 쏟는다. 인생 후반기 60년에 ‘K-ART’라는 천지마음이 융·복합된 내용의 그림을 완성하고 알리겠다는 꿈을 세웠기 때문이다.

지난 4월 6일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인근에서 장 화백으로부터 120세 인생 계획을 들었다. 만발한 벚꽃이 바람에 날리는 석촌호수 풍광에 마음이 설렜다. 장 화백은 벚꽃이 흐드러진 풍광을 마음에 담아 붓으로 스케치하였다.

원암 장영주 화백이 4월 6일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원암 장영주 화백이 4월 6일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 화필을 놓은 지 21년 만에 다시 붓을 들어 2016년 청주에서 개인전을 열어 화제가 됐습니다.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은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어떻게 화가가 되었는지 성장과정을 들려주시지요?

청주가 고향인데, 교육자이시던 아버님께서는 상당한 경지에 오르신 아마추어 화가이시기도 하셨지요. 어릴 때 사과를 먹으라고 주시면 먼저 그린 뒤에 먹던 기억이 있습니다.

충북 청주시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는 무심천이 흐르고 주산은 우암산이어요. 선도(仙道)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6·25동란이 끝나고 부모님을 따라 충북의 제천으로 이사를 갔어요. 도중에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이 있고 밝은 언덕인 박달재가 있어 이 역시 천지인 합일사상에서 지어진 지명임을 선도 단학을 한 후 체득했어요.

부모님의 고향이 또한 충주로 마음의 중심을 잡으라는 소망이 깃든 곳입니다. 국학원에 근무하고부터 우리나라의 지명을 선도적으로 재해석하는 연구를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요.

- 6·25 때 큰 형님과 큰 매형이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습니다. 60년 만에 금강산에서 큰 형님을 상봉했다고 하셨는데,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겪으셨네요.

  저는 일제로부터 독립한 후 2년 뒤에 태어났고 4살 때 6·25동란을 당해 50세가 되신 어머님의 등에 업혀 청주에서 밀양까지 피란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큰 형님과 은행원이었던 매형께서 어찌 되었는지 북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로 인해 어렸을 때 집안 분위기는 늘 쓸쓸하고 어두웠는데, 이것이 내 초창기 작업의 분위기가 되었어요.

 10여 년 전,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로 금강산 온정각에서 형님을 만났습니다.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우려하였는데 형님이 입장하는 모습이 꼭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 걸어오는 듯하여 단박에 알아 뵙고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올렸습니다. 부모님은 아들과 사위를 잃은 슬픔을 평생 가슴에 묻은 채 돌아가셨고 나 또한, 한 차례 상봉 뒤엔 다시 소식을 접할 수 없지요. 많은 국민이 겪은 비극입니다.

국학 운동에 전념하던 장영주 화백은 몇해 전 은퇴하고 21년 만에 다시 화필을 잡고 인생 후반기 60년을 설계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국학 운동에 전념하던 장영주 화백은 몇해 전 은퇴하고 21년 만에 다시 화필을 잡고 인생 후반기 60년을 설계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 미술은 언제 시작하였습니까?

  내 생애의 첫 기억이 세상이 온통 새하얀데 따뜻한 곳에서 기분 좋게 흔들거리던 것입니다. 겨울이라 흰 보자기에 싸여 어머님의 등에 업혀 남으로 피난을 가던 중이었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 다음 기억이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당시 구하기 어려운 만화를 자주 선물해 주셨는데 읽고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걸 본 아버님이 종이와 크레파스를 사주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이신 아버님은 어느 학교로 전근을 가든지 1m 이상의 큰 종이에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손수 그려서 학교 로비에 걸어 놓고 애국심을 고취하셨기에 자주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접할 수 있었고, 훗날 제가 국학인이 되어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연구하는 게기가 되었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의 견내량, 명량, 순국하신 노량을 참배하러 갑니다. 특히 울돌목인 명량은 수십 번을 오가면서 그 지역 주민과 인솔해간 학생과 시민을 교육하였습니다. 영화 명량은 33번을 보았습니다.

-청주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부 활동을 한 것이 화가로서 출발점이네요. 그런데 진학은 청주교육대학으로 하셨어요?

처음에는 의사가 되려고 했는데 아버님의 퇴직과 가정형편이 기울어져 의사가 되기보다는 부모님을 얼른 안정되게 모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2년제인 교육대학을 졸업하여 교편을 잡습니다.


-청주, 서울에서 교사로 근무하셨는데, 그 시절 어떻게 보냈습니까?

고향인 청주에서 초등학교 교사 2년, 중학교 미술교사로 5년을 보낸 뒤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 소재의 고등학교 교사로 5년, 총 12년을 교단에 선 뒤에 미련 없이 사표를 쓰고, 34세에 전문화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교사를 그만둔 계기가 있었습니까?

소망하던 화가가 되기 위하여 교사직을 그만두었지만, 오래전부터 화가의 길은 아주 귀한 곳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그 귀한 곳은 막연하지만 바로 깨달음이었습니다. 무명 화가로 가난하고 고독했고, 어머님과 아들의 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으나 결과적으로 소중한 것을 많은 얻었습니다. 특히 깨달음과 가족의 소중함을 습득한 기간이었습니다. 이때 아내와 아들 딸 어머님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지요. 홍익가정 1호가 되었습니다.

-교사를 그만둔 후 화가로서 험난한 길을 걸었는데, 생활은 어떻게 하고, 화가로서 수업을 어떻게 하였는지요?

  당시 화단은 지역과 출신 대학 위주의 유명 교수와 선후배의 카르텔과 같은 조직으로 엮어져서 나같이 독학한 화가들의 입지는 아주 열악했습니다. 국전에서 일곱 번 고배를 마시고는 절망적인 의기소침과 다시 일어나자는 희망의 의지 사이를 오가던 차에 목우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유난히 달 밝은 밤, 아내와 함께 막연하게 희망에 찬 미래를 꿈꾸던 기억이 납니다. 막상 생활의 어려움을 그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화풍이 시원시원하고 표현력이 간결했다고 하는데, 누드 크로키를 배우고 가르치면서 한국 누드크로키회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나아간 이유가 있습니까?

어려서부터 남들과 같이 그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미술반 학생들은 투명 수채화를 많이 그리는데, 저는 유화처럼 두껍게 물감을 이겨 바르는 불투명 수채화를 좋아했습니다. 전문 화가라고는 하나 선·후배도 없고 돈도 없는 무명의 화가였다가 대상을 받으니 이곳저곳에서 관심을 가져 주었습니다. 당시 일반시민의 문화생활을 선도한 일간 신문사들의 문화센터가 막 시작되었습니다. 마침 한국일보 문화센터에서 누드 크로키를 가르쳐 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와서 덥석 시작하여 약 7년을 계속 했어요. 4년차부터는 ‘한국크로기회’를 결성하여 동호인 창립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 뒤로 나는 떠났지만 후학들이 이어 받아 올해로 35년차가 됩니다. 어찌 되었든지 이것이 한국에 누드 크로키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2017년 개인전을 열고 미국으로 미술유학을 떠났던 장영주 화백은 오는 8월 프랑스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 작업에 여념이 없다. [사진=김경아 기자]
2017년 개인전을 열고 미국으로 미술유학을 떠났던 장영주 화백은 오는 8월 프랑스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 작업에 여념이 없다. [사진=김경아 기자]

 

-작품을 보면 ‘바다’를 소재로 한 것이 많습니다. 바다를 자주 그리는 이유가 있습니까?

  바다가 없는 충청북도에서 태어난 것이 첫 번째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만 늘 수평선 너머에는 자유가 존재하는 듯 한 마음이 들고 끓는 파도에서는 용솟음치는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도, 소설 ‘모비딕’에서도 바다는 영원한 모험과 자신을 넘어 서는 자유의 상징이고 화엄의 바다이지요. 저는 그저 좋아할 뿐입니다.

-목우회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고, 대한민국 미술협회 이사를 지내고 중국 정부 초청 세계 100대 화가전에 참가하는 등 화가로서 국내외에서 인정받았는데, 그림을 그만두었어요?

  이곳저곳의 문화센터 강사와 일간스포츠 신문사 등의 소설 삽화를 그리면서 쌀과 물감을 사기도 어려웠던 형편도 점차 나아졌어요. 독학을 하다가 30대 후반에 대상을 받고 어느 정도 이름을 얻고 생활도 안정되어 갔으나 화가만으로는 도저히 빈 가슴이 채워 지지 않은 채 40대 중반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붓은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라는 생각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붕에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와는 헤어져야 한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지하방에서 살던 때라 아들이 심장병을 얻고 어머님은 해소가 심해져 마음고생은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인 유학의 뜻은 이미 중단하고 아들의 치료를 위해 어찌어찌 하다가 당시 단학선원 지금의 단월드에 들렀습니다. 그때 일지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님을 처음 뵙게 되었으니 30년 전 일입니다. 아들은 곧바로 수련을 시작하고 저는 몇 년 뒤에 센터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5년간은 거의 하루 종일수련을 했습니다.

  단학 수련을 하기 훨씬 전이지만, 서울에서 처음 연 화실을 ‘통한 화실’ 곧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통하는 화실이라고 이름 지을 정도로 막연하게나마 초월적인 그 무엇으로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깨달음이 그 어디에도 아닌 단월드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고 모래밭에 물이 스며들 듯이 화가로부터 단학인이 되어 갔습니다.


-단학을 만나 국학을 알리는 강연자로 유명해지셨는데, 국학은 어떻게 공부하고 교육하였는지요?

  제가 유명한 강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기를 쓰고 열심히 하였습니다. 처음 특별 수련시간에 우리민족에게는 우리만의 역사가 있고 제대로 전수되지 않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단학 센터에서 알려 준,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승이신 일지 이승헌 총장께서 깨우쳐 주신 나와 민족과 인류의 정체성 곧 ‘국학’입니다. 뜻을 세우니 공부가 강의가 되고 강의가 공부가 되었습니다. 에너지는 정보를 품고 있기에 수련 속에서 천부경과 삼일신고, 참전계경이 거의 속에서 배어 나오듯이 저절로 터득되어 왔습니다. 이 현상이 바로 스승과 제자간의 동시동탁이라는 것도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20년 간 국학을 알리며 국학원 교육원장, 원장대행으로 퇴임하고,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는데, 국학을 알리기 위해 지금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20년의 기간 동안에 국학 칼럼을 위한 삽화 이외에는 단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화단에 다시 등단하니 붓은 녹슬고 물감은 메말랐습니다. 그러나 수련으로 눈뜬 나의 영혼은 또 다른 경지의 화가가 되기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천명과도 같은 그 요구에 따르기 위하여 갓 등단한 신인이 되어 새롭게 그림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K-ART’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인간과 우주의 삼라만상에 깃든 천지기운을 통한 그림의 스타일과 국학, 곧 홍익철학을 통하여 보는 우주관, 곧 천지마음이 융·복합된 내용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저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 인생후반기 화가로서 새로운 삶의 설계하고 계시는데요. 국학운동가로서 알려온 홍익정신이 화가로서의 작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생각이 점차 더욱 강하게 듭니다. 철학 속에서 미학이 파생 되어 나오는데, 한민족의 홍익 철학이야 말로 우주의 현상을 꿰뚫고 있기에 화가로서 홍익철학을 아는 만큼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없는 영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난해 미국으로 40일 넘게 미술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70이 넘은 나이에 미국행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인지요? 미국에서는 어떻게 생활하셨는지요?

 30대 초반부터 꿈꾸던 유학이었으나 이래저래 꿈을 접고 70세가 되어 다시 붓을 잡자 내가 새로워질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69세에 은퇴를 하고 70세가 되어 스스로에게 3가지 선물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이를 완전하게 임플란트를 하여 복원하는 것, 두 번째는 매년 1회씩 개인전을 여는 것, 세 번째는 유학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퇴로를 끊고 말도 교통도 사람도 낯선 곳에서 24시간을 오직 그림에 전념할 환경을 제게 선물하는 것이 뉴욕의 자취 유학생활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31편의 칼럼으로 기록하여 필요한 분들께 나누고 있습니다. (장 화백은 31개 칼럼을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4300986570)

원암 장영주 화백은 120세 삶을 살려 깨달음을 전하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원암 장영주 화백은 120세 삶을 살려 깨달음을 전하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올해는 어떤 작업을 하는지요?

  ‘K- ART’를 더욱 심화하여 체질화하고 있습니다. 올해 8월 29일부터 프랑스에서 개인전을 열고, 귀국하여 한국에서 개인전을 하고 내년에는 미국에서 개인전을 두 번 정도 개최할 예정입니다. 미국에서 귀국하여 8개월 동안 작업한 게 1,000여 장 됩니다.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이승헌 저)라는 책을 읽으시고 가장 감명 깊었던 점은 무엇인지요?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을 듣는 순간 곧바로 유학을 결심했고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책 내용에 나오는데, 그런 중에도 강석규 총장님의 술회가 절절하게 다가 왔는데 제가 20대 중반부터 5년간 교장선생님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롤 모델이었는데 90세의 생일에 통곡을 하셨다는 대목에서는 준비 없는 노년의 허망함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런 의미로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는 저서는 나에게는 가장 확실한 복음서입니다.
 

- 그림 작품을 하는 일이 매우 고된 데, 평상시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우선 신체적으로 건강을 확보하여 하루에 최소한 5시간에서 7시간 그림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많이 걷고 움직이게 되고 뇌파진동과 발끝 부딪치기를 자주 합니다. 젊어서 태권도, 유도, 검도, 복싱, 수영, 스케이트 등을 익혔고 한 때는 아내와 함께 물구나무서서 걷기도 하였습니다. 정신적인 건강을 위하여 매일 일기를 쓰면서 계획하고 실천하고 점검하고 이를 토대로 다시 계획 실천을 하는 ‘PDCA’를 실천합니다. 이메일로 받아보는 ‘일지 희망편지’ 글을 1회부터 지금까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필사하는데 세상을 뜨는 날까지 계속 하려고 합니다.

- 앞으로 100세, 120세까지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신지요? 계획이 있다면요?


깨달음을 전하는 화가가 될 것입니다. 영혼을 그리고, 영혼을 힐링하고, 스스로 영혼을 완성하여 다른 이들의 영혼의 완성을 돕는 화업을 계속할 것입니다. 곧 ‘K-ART’를 완성하고 전파하는 화가가 될 것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