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팀은 비바람 속에 우의를 받쳐 입고 함안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군에 올랐다. 고령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군이나 합천 다라가야의 옥전고분군과 비교했을 때 고분 하나 하나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 마치 경주에서 본 신라 대릉원의 고분에 버금가는 대형 고분들이 산재했다. 외떨어져 두 개의 봉우리처럼 나란히 조성된 고분은 그 주인공들이 부부나 형제처럼 특별한 관계가 아닐까 싶었다.

2013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말이산 고분군 중 나란히 조성된 고분 2기. [사진= 강나리 기자]
2013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말이산 고분군 중 나란히 조성된 고분 2기. [사진= 강나리 기자]

 

고분군이 있는 말이산 구릉은 남북으로 약 1.9km 정도 길게 뻗은 주능선과 서쪽으로 완만하게 뻗은 여덟 갈래의 가지능선으로 되어있었다. 안내문에는 원래 모습이 지금보다 북동쪽으로 더 이어졌을 것인데, 대일항쟁기 진주-마산 간 도로와 철도 설치, 급격한 도시화로 일부 훼손되었다고 한다.

말이산에 관해 안내판에는 머리(頭)산의 한자표기로 우두머리의 산, 왕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고 해석되어 있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정경희 교수는 “한국 선도에서 천손으로서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천은 산에서 지냈다. 백두산과 강원도 태백산,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 등 제천단이 있는 곳을 보면 알수 있다. 말이산은 마니산이 마리산, 머리산으로 불린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곳 말이산 고분군과 700m 떨어진 곳, 왕궁지와는 1.4km 거리에 있는 가야분지의 나지막한 구릉에서 대형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40개의 기둥구멍만 남아 있지만 건물 평면 규모가 길이 39.9m, 너비 14.2m나 되어 고대 건물치고 유례가 드물다. 이곳을 함안에서는 고대 국제회의가 열렸던 고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이산 고분군과 왕궁지 사이에 위치한 고당 유적지. 함안박물관 영상설명에는 제천지로 추정하고 있으나 선도 제천은 통상 백두산, 태백산, 마니산 등 산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미루어 국제회의가 열렸던 장소인 고당으로 보인다. [사진=함안박물관 영상 캡쳐]
말이산 고분군과 왕궁지 사이에 위치한 고당 유적지. 함안박물관 영상설명에는 제천지로 추정하고 있으나 선도 제천은 통상 백두산, 태백산, 마니산 등 산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미루어 국제회의가 열렸던 장소인 고당으로 보인다. [사진=함안박물관 영상 캡쳐]

 

함안박물관 안에는 서기 529년 가야의 여러 나라와 신라, 백제, 그리고 왜가 국제회의를 했다는 고당을 재현한 모형이 있었다. 이 고당을 제천단 내지 왕궁, 또는 신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말이산이 제천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약 1,500년 전 한반도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안라고당회의’

우리에게 국제회의로 많이 알려진 것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종전 후 각국이 취할 입장을 정리하고,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회담들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약 1,500년 전 이 땅에서도 국제회의가 열렸다는 것이다.

529년 한반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장수왕 이래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폈고, 백제와 신라는 영토를 방어하거나 확장하기 위해 번갈아 적이 되기도 하고, 우방이 되기도 했다. 고조선 멸망 후 대륙에서 벌어졌던 각축전 상황이 한반도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그 틈새 속 가야는 독자적인 입지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당시 일화가 522년 대가야 이뇌왕과 신라왕녀의 혼인동맹, 그리고 혼인동맹의 파기이다.

‘안라 고당회의(安羅高堂會議)’라 불리는 국제회의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 권 제17 에 나온다. 왜는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남가라와 탁기탄을 재건토록 권하였다.”고 하며, “백제는 장군 군윤귀, 마나갑배, 마로 등을 파견하였으며, 신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보내지 않고 부지나마례와 해나마례를 안라로 보냈다.”고 한다. 이때 안라(아라가야)는 새로 고당을 만들어 맞이했다, 회의는 여러 달 동안 이루어졌는데 백제의 사신들을 당 아래 있게 하여 장군 군 등이 한스럽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연대나 자국과 타국의 입장 등에 왜곡이 매우 심해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으나, 아라가야에서 국제회의가 열린 것을 사실인 듯하다.

회의가 열린 배경에는 남가라가 신라에 의해 무너지고, 백제 성왕이 섬진강 하류인 하동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경남 김해와 가까운 창원의 탁순국과 아라가야가 가장 큰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작용했다.

가야와 신라, 백제, 왜가 참가한 안라고당회의가 열렸던 고당을 재현한 모형. [사진=강나리 기자]
함안박물관에 전시된 가야와 신라, 백제, 왜가 참가한 안라고당회의가 열렸던 고당을 재현한 모형. [사진=강나리 기자]

 

<일본서기>는 신라에 의해 무너진 남가라(=금관국, 경남 김해지역)와 탁기탄(경남 밀양 영산지역)의 재건 혹은 임나가야의 재건을 목적이라고 했으나, 실질적인 목적은 백제와 신라의 아라가야 지역 진출을 저지하고자 한 외교적 필요였다. 왜가 참가한 이유는 신라가 김해지역을 차지한 상황에서 아라가야까지 진출했을 때 가야 지역을 통한 교역로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안라국제회의는 실패였다. 신라는 이미 남가라, 즉 김해지역을 차지한 상태였기에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이유가 없었다. 백제 또한 하동진출을 계기로 가야 지역을 차지할 가능성을 이미 확인했다. 회의가 끝난 후 530년대 창원의 탁순국도 신라에 투항했고,. 장군 이사부를 출전시켜 가야지역 4개 촌락을 공략했다. 백제는 남강을 따라 가야지역에 진출하고 신라와 함께 가야지역에 구례모라성과 걸탁성을 쌓았다고 한다. 가야남부가 신라와 백제에 의해 분할‧점거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라가야의 입장에서 안라고당회의로 인한 소득이 없지 않았다. 안라고당회의를 주최한 것을 계기로 가야 의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입장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백제 성왕의 요구로 개최된 541년, 544년 사비 회의에서도 안라국, 즉 아라가야가 가야를 대표해 참석했다고 한다. 540년대 이후에는 대가야보다 더 막강하여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형’ 또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신라 경주의 대릉원에 있는 고분처럼 웅장한 말이산 고분 앞에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가야문화답사팀. [사진=강나리 기자]
신라 경주의 대릉원에 있는 고분처럼 웅장한 말이산 고분 앞에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가야문화답사팀. [사진=강나리 기자]

 

그런데 한 가지 검토해야 할 과제가 있다. 경남 함안시에서는 안라고당회의 유적 발굴을 계기로 종전 임나가야가 김해 금관가야라는 설을 뒤집고 함안 아라가야라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그런데 임나는 그 성격 규명과 왜와의 관계, 일본 식민사학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과 얽혀 가야사 연구에서 걸림돌이자 난제이기도 하다. 다음 편에서 임나가야를 보는 다양한 시각과 과제를 살펴본다.

* 가야문화유산답사기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천손문화답사팀이 지난 2017년 12월 9일과 10일 양일간 경남 고령, 합천, 산청, 함안, 김해 등 대표적인 가야문화권의 고분군과 박물관을 탐방한 내용이다. 답사팀은 동 대학원의 정경희 교수가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