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양자물리학의 최정점에서, 이 세상의 기원을 찾고 있는 세계 최대의 입자물리학 연구소인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 전시관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질문이 있다고 한다.

1. Where do we come from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2. What are we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3. Where are we going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를 포함한 위의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한민족의 천손문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한다.

다시 하늘과 만나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환구단(圜丘壇)에 나아가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드린 후 황제에 즉위했다. 중국의 천자나 일본의 천황과 대등한 자격을 가진 황제국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는 한편 독립된 나라의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환구단(圜丘壇)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이다. 《주례(周禮)》〈소(疎)〉에 따르면, 흙의 높은 곳을 구(丘)라 하고 환(圜)은 하늘의 둥근 모양을 본뜬 것이라 하니 높은 곳인 까닭에 하늘을 섬긴다고 하였다. 환구단(圜丘壇)에서의 천제(天祭)는 태양이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고 여기는 동지(冬至)에 교외의 들판에서 깨끗한 자리를 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환구단 앞에 있는 석고.
환구단 앞에 있는 석고.

이러한 제천의례는 가장 성대하고 중요한 국가 제사였으며, 천명(天命)을 받아 지상을 통치하는 군주의 권력이 불변함을 공언하는 수단이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자국 이외의 국가는 모두 오랑캐로 보며 주례(周禮)에 따른 환구(圜丘)에서의 제사는 오직 자국의 군주인 천자(天子)만이 지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조선에서도 왕(王)이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도 하였으나 공식화되지는 못하였다.

천명으로 나라를 다스리다

유교에서의 ‘하늘’은 삼라만상의 주재(主宰)로서 '상제(上帝)'라고 부르기도 하고 형체로서는 '천(天)'이라고 이해되는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지상신(至上神)이다. 이러한 하늘이 총명한 사람을 군주로 임명하여 자연 상태의 혼란을 극복하고 세상의 질서를 확보하여, 백성들의 스승으로서 올바른 삶의 표준을 제시한다고 하는 것이 유교의 천명론(天命論)이다. 따라서 한당(漢唐)시대의 유학에서 군주는 하늘의 지시를 받는 절대적 존재로 상징화되었다.

그런데 군주에 대한 불신 점차 커져가면서 점차 천명론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송(宋)나라 주자학 시대로 들어오면 이제 군주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하늘의 법칙인 도(道)를 알고, 이에 맞도록 통치해야 하는, 자신도 도를 닦아 성인(聖人)처럼 될 것을 요구받는 존재로 표현된다.

천명(天命)에서 민심(民心)으로

하늘의 지시를 받는 절대적 존재인 군주가 주권자라 할 때 문제는 ‘하늘의 명령’ 혹은 ‘하늘의 뜻’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전통 유교에서는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로부터 사실상 ‘백성이 곧 주권자’라는 관념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나는 것이 전통적으로 유가는 ‘국가의 주권은 하늘 또는 백성에 있는 것이요, 결코 군주에게 있지 않다’고 설명해왔다. 맹자(孟子)는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나라)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존재다"면서 "백성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 천자"라고 했다

민심에서 공론(公論)으로

고대의 천명 사상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민심론으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민심에 관해서도 회의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민심은 종종 편파적이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경(《書經》 「周書」 <君牙>)에 보면 “백성의 마음은 중용(中庸)이 없으니, 오직 네가 중용으로 이끌어라.”라고 하고 있으며 논어(《論語》 衛靈公 27)에도 “대중이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살펴야 하고, 대중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민심에 대한 회의가 싹트면서 송대(宋代)에는 마침내 ‘공론(公論)’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주자는 ‘천리에 따르고, 인심에 부합하여, 천하 사람들이 모두 함께 옳게 여기는 것을 ‘국시(國是)’라 정의하고, 이를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인 ‘공론(公論)’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한민족의 천손 사상

중국의 경우 상대(商代)의 상제(上帝)는 왕실의 조상신적 측면이 강하여 왕은 혈연관계로 맞닿아 있었으나, 주대(周代) 이후에는 자연신으로서의 천신과 인격신으로서의 조상신이 분화되었고, 아울러 혈연적 고리 또한 사라져갔다.

이와 달리 고대 한국에서 시조는 천신의 직계 후손으로 천(天)과의 관련성이 직접적이었다. 시조가 천(天)의 직계 후손이었기에 시조신의 연장선상에서 천신을 파악하였으며, 천신과 시조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가 전래되기 전에도 다양한 종류의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있었다. 부여, 고구려, 백제 등 여러 왕조에서 "동맹", "수신", "영고" 등의 이름으로 불린 제사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오방의 신, 각국의 건국자들에게 제사 지냈다. 신라의 신궁도 천신 숭배 시설이라고도 여겨진다.

고구려에서 천신은 조상신이었다. 고구려왕이 천(天)과 혈연적으로 연결되는 존재였다. 따라서 시조에 올리는 제사가 곧 제천이었으며, 천신의 연장선상에 시조왕이 있었다. 주몽은 천제지자(天帝之子)로 태어나 종국에는 천(天)으로 돌아가고 있다. 천(天)과의 관련성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주몽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제의가 곧 제천인 까닭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었다

천신을 조상신으로 보는 양상은 이후에도 이어져 고구려의 선왕(先王)들을 일컬어 ‘천손(天孫)’이라 칭하였고, 왜에서는 고구려왕을 ‘고려신자(高麗神子)’라 언급하고 있다. 고구려왕은 혈연계보로 천(天)과 연결되어 천제의 후손으로 여겨졌다.

신라의 경우 천지부모(天父地母) 사이에서 일광감응(日光感應)으로 시조가 탄생했다는 박혁거세의 신화 원형이 나타났다. 부여에서도 1세기에 부계를 천(天)과 연결하는 시조신화의 큰 줄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경우 시일이 지날수록 인격신적인 측면이 약화된 반면, 자연신으로서의 상징적인 면모가 강화되어가며 천신과의 혈연적 고리는 약해져 갔지만 고구려는 이와 정반대의 과정을 밟게 된다. 한민족의 천손 사상은 혈연을 바탕으로 하는 천인합일의 양상을 강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참고 자료:

유교의 국가론과 통치 윤리- 이상익(부산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유교와 정치원리-권향숙(명지대학교 교수)

고려시대 동명에 대한 인식-채미하(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고구려 국가제사 연구-강진환(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