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김정희 필 침계’ 등 19세기 대표적 학자이자 서화가였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 3점을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의 세도정치(勢道政治) 기간에 문인이자 정치가로 활동하였으며 금석문(金石文)의 서예적 가치를 재평가한 추사체(秋史體)를 창안해 한국 서예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3건의 서예 역시 추사의 학문‧예술적 관심과 재능이 구현된 작품이다. 

보물 지정이 예고된 ‘김정희 필 대팽고회(金正喜 筆 大烹高會)’는 작가가 세상을 뜬 해인 1856년(철종 7년)에 쓴 만년작(晩年作)으로, 두 폭으로 구성된 예서(隷書) 대련(對鍊)이다. 내용은 중국 명나라 문인 오종잠(吳宗潛)의 '중추가연(中秋家宴)'이라는 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푸짐하게 차린 음식은 두부‧오이‧생강‧나물이고, 성대한 연회는 부부‧아들딸‧손자라네(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라는 글귀를 썼다.

▲ 추사 김정희 필 침계. <사진=문화재청>

 대련(對聯)은 두 폭의 축(軸)으로 된 회화나 서예작품으로 두 폭의 내용과 양식이 연결되며 서로 대칭되는 도상(圖像)을 배치하거나 자수(字數)를 맞춰 한 묶음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대팽고회는  평범한 일상생활이 가장 이상적인 경지라는 내용에 걸맞게 소박한 필치로 붓을 자유자재로 운용해 노(老) 서예가의 인생관(人生觀)과 예술관(藝術觀)이 응축되어 있는 김정희 만년의 대표작이다.
 

‘김정희 필 차호호공(金正喜 筆 且呼好共)’은 “잠시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좋아서 매화와 함께 한 산에 사네(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라는 문장을 예서로 쓴 대련(對聯) 형식이다. 두 번째 폭에는 ‘촉(蜀)의 예서 필법으로 쓰다(作蜀隸法)’라는 글귀를 넣어 중국 촉나라 시대의 비석에 새긴 글씨를 응용했음을 밝혔다. 촉나라 예서(隸書)는 단정하고 예스러운 필치가 특징이다. 이 작품은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정희의 학문이 예술과 결합된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필획 사이의 간격이 넉넉하고 자획의 굵기가 다양하며, 빠른 붓질로 속도감 있는 효과를 내는 등 운필(運筆)의 멋을 최대한 살려 김정희 서예의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김정희 필 침계(金正喜 筆 梣溪)’는 화면 오른쪽으로 치우쳐 예서로 ‘침계(梣溪)’ 두 글자를 쓰고, 왼쪽에는 행서(行書, 약간 흘려 쓴 한자 서체)로 8행에 걸쳐 발문(跋文)을 썼으며, 두 과의 인장을 찍어 격식을 갖추었다. 침계(梣溪)는 김정희와 교유한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의 호(號)이다.

   윤정현(尹定鉉, 1793~1874)으로,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우(季愚), 호는 침계,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의 아들로 51세 때 출사하여 이조ㆍ예조ㆍ형조의 판서를 거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냈다. 윤정현은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특히 비문(碑文)에 능하였다. 문집으로 《침계유고》가 있다.
 

 발문에 따르면 윤정현이 김정희에게 자신의 호를 써 달라고 부탁했으나 한나라 예서에 ‘침(梣)’자가 없기 때문에 30년간 고민하다가 해서(楷書)와 예서를 합한 서체로 써 주었다고 한다. 작품의 완성도를 갖추기 위해 수십 년을 고민한 김정희의 작가적 태도와 이러한 김정희를 기다려 준 윤정현의 인내와 우정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해서와 예서의 필법을 혼합해서 쓴 ‘침계’는 김정희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구성과 필법에서 작품의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김정희의 학문‧예술‧인품을 엿볼 수 있어 더욱 의미가 크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한 김정희 필 침계 등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