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은 어느 때 찾아도 좋다. 오랜 역사만큼 사람을 품어준다. 생각해보니 경복궁에 갔던 때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여름날이거나, 사진을 찍지 못할 만큼 손이 얼은 겨울날이었다. 여름 비오는 날을 골라 경복궁에 갔다. 유홍준 교수가 쓴 글에서 “비오는 날 근정전 앞이 빗물로 가득 차면 바닥에 깐 박석이 하얗게 떠오른다”는 대목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박석을 보고 싶었다. 아! 정말이었다. 빗물 속에서 박석이 하얗게 떠올랐다. 겨울날 경복궁을 찾았던 건 고궁을 배경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자 했다. 그 풍경은 추위를 잊게 했다.

지난 3일 입춘을 하루 앞두고 다시 경복궁을 찾았다. 경복궁의 역사를 알고, 경복궁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더듬어 보려는 뜻이었다. 경복궁(景福宮)은 조선 왕실의 법궁(法宮)이다. 조선의 정치와 역사의 산물이며 왕권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고궁박물관을 먼저 보고 경복궁에 들어섰을 때 시계가 11시를 알렸다. 흥례문 광장은 한가했다. 삼삼오오 한복을 입은 이들이 서넛 있을 뿐. 강추위에 찾는 이가 적었다.

▲ 경복궁 정문의 이름은 오문(午門)이었는데 세종 때 ‘광화문(光化門)’으로 개명하였다. 광화란 “왕의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

 경복궁관리소의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景福宮 안내 자료를 먼저 읽었다.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왕이 거처하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이다. 위로는 백악산에 기대어 터를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대로)가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경복(景福)'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다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당시 경복궁에는 왕과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외전과 궐내각사들, 왕과 왕비 및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전각들, 휴식을 위한 정원 등 500여 동의 건물들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고,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구실로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의 본래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다. "

 

이미 살펴본 것처럼 경복궁의 궁명부터 궁궐 안 문, 건물 이름은 삼봉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조선 태조 4년 9월 궁궐이 완성되었을 때 태조는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였다. 

경복(景福)이란 ‘큰 복’을 뜻한다.  정도전은 경복을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라는 시(詩)에서 가져왔다. 정도전은 태조와 자손이 만대 태평의 업(業)을 누리고 사방 신민이 길이 보고 느끼게 하라는 의미로 경복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정도전은 경계의 말을 덧붙였다. “《춘추(春秋)》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에 거의 만백성의 봉양하는 데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태조실록》, 태조4년 10월7일) 아무리 큰 복을 받아도 백성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깨움이다.

▲ 흥례문(興禮門)은 원래 이름이 홍례문(弘禮門)이었다.

 

경복궁에는 동으로 건춘(建春), 서로 영추(迎秋), 북으로 신무(神武), 남으로 오문(午門)이라는 네 개의 문이 있다. 남문을 오문이라 한 것은 오(午)가 12지의 하나로서 정남(正南)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오문을 정문(正門)으로 하였는데, 왜 정문인가.

정도전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 정문(正門)을 말하자면, 천자와 제후가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도전은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고 하여 정문(正門)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하였다. 어디 궁궐의 정문만 이런 역할을 할 것인가. 모든 공공기관의 정문이 해야 할 역할이 아닐지.

 

경복궁 정문의 이름은 세종 때 ‘광화문(光化門)’으로 개명하였데 광화란 “왕의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 이 내용은 광화문광장 지하에 있는 세종전시관에서도 볼 수 있다. 또 《시경(詩經)》의 “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미친다(光被四方 化及萬方)”라는 구절에서 광화의 뜻을 구하기도 한다. 세종대왕이 광화문로 개칭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는 펴겠다는 뜻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리라. 그러니 경복궁을 제대로 보려면 이 광화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흥례문(興禮門), 광화문에서 안으로 들어서면 앞에 보이는 문이다. 예를 일으키는 문이라는 뜻이니, 이 문 앞에서는 예를 갖추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예를 갖추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안에 임금이 계시기 때문이다. 임금이 계신 곳으로 들어가려면 그에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할 터. 예를 갖추지 못하면 들어가서는 안 될 문이다. 흥례문의 본래 이름은 홍례문(弘禮門)이었는데, 고종 때 중창하면서 홍례문(弘禮門)으로 바꾸었다. 홍례는 예를 크게 한다는 뜻이니, 흥례, 홍례 비슷한 의미다. 가운데 글자 예(禮)는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한양 도성의 남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했다.

옷차림을 살펴보고 몸을 바르게 세워 흥례문 오른쪽으로 들어가니 앞으로 근정문이 보이고 그 앞에 영제교(永濟橋)가 있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건설할 때 이 다리도 만들었고, 영제교라는 이름은 세종 8년(1426)이다. 경회루 연못에서 흘러나와 근정문과 흥례문 사이를 지나 동십자각 옆의 수구(水口)로 나아가 삼청동천과 합류하는 물이 이 영제교를 통과한다. 궁궐 안 어구(御溝)를 금천(禁川)이라 하고 그 위에 놓은 다리를 대개 금천교(禁川橋)라 한다. 조선은 궁마다 별칭을 두었으니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는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금천교는 옥천교(玉川橋)이다.

▲ 흥례문과 근정문이 사이에 금천(禁川)에는 영제교(永濟橋)가 있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건설할 때 이 다리도 만들었고, 세종 8년(1426) 영제교라는 이름지었다.

영제교에 들어서면 양 옆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네 마리 서수(瑞獸)이다. 돌로 만든 짐승이라 하여 석수(石獸)라고 하는데, 금방이라고 물에 들어가 잡귀를 물리칠 기세로 웅크린 모습이 생동감이 넘치며 입 사이로 삐쭉 내민 혀는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잡귀에게는 한 없이 무서운 존재이지만, 인간에게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조선시대 빼어난 석조물의 하나이다.

▲ 영제교에 양 옆으로 네 마리 서수(瑞獸)가 있다. 돌로 만든 짐승이라 하여 석수(石獸)라고 하는데, 금방이라고 물에 들어가 잡귀를 물리칠 기세로 웅크린 모습이 생동감이 넘치며 입 사이로 삐쭉 내민 혀는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금천교는 백성의 공간과 왕의 공간을 구분짓는 다리다. 문자 그대로 금(禁)하는 개울이니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이며, 사사로운 것을 금한다는 의미이다. 정문에서 막지 못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금천에서 마지막으로 끊게 하려는 뜻을 암시한 것이리라.

금천에 흐르는 물은 기이하고 사특한 것을 씻어내는 정화수가 아닐까.

 

영제교를 지나며 역사를 더듬었다. 궁궐에 있는 영제교는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에 타자 영제교도 폐교되었다. 고종 3년(1867) 경복궁 중건 때 중수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수난을 겪었다. 1916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신축하면서 영제교를 헐어냈다. 1965년 근정전 동행각과 건춘문 사에 복원하였다가 2001년 경복궁 일곽을 중건하면서 당초 있던 곳에 복원하였다. 국력이 강했더라면 천년만년 세월의 흔적을 기록하며 원래 자리를 지켰을 영제교. 이 다리가 지금 이대로 영원하기를 빌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