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웃는 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어와 둥둥 내 사랑이야!” 판소리를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인도 춘향전의 사랑가 정도는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몽룡과 기생의 춘향의 이야기는 동화, 판소리, 창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문학형태로 공연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록實錄이란 명칭으로 매우 현실적인 춘향전이 찾아왔다.

▲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8일과 9일 무대에 오르는 창극 '춘향실록-춘향은 죽었다' <사진=국립민속국악원 제공>

국립민속국악원은 2월 8일과 9일 양일, 저녁 8시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창극 ‘춘향실록-춘향은 죽었다’를 무대에 올린다. 지기학 예술감독은 춘향전의 이몽룡이 실존 인물이라는 역사기록을 기반으로 시대배경이 된 조선 후기에 맞는 설득력있는 전개로 창극을 연출했다.

이번 창극은 초로의 선비가 된 이몽룡이 광한루에서 소신을 지키기 위해 죽은 춘향을 회상하는 쓸쓸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창극은 한국판 신분상승 동화 신데렐라가 아닌 현실을 아프게 겪어낸 깊은 사랑을 노래한다. 춘향은 몽룡과 재회하지 못하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결국 죽음을 택한다. 세상을 살면서 소신을 지키며 사는 어려움과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를 관객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이 창극의 기본 전제가 된 ‘이몽룡’으로 추정되는 실존인물은 누구일까. 조선 남원부사 성안의 (1561~1629)의 아들 성이성(1595~1664)이라고 한다. 그는 13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서 살았으며, 3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네 차례나 수행했다. 성이성이 쓴 《호남암행록》에는 인조 25년(1647년) 12월 1일 암행을 마치고 남원에 들렀던 일기가 기록되어 있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다. 소년시절 일을 생각하느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思少年事 夜深不能寐 사소년사 야심불능매)”

성이성은 인조와 효종, 현종 3대를 모신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후에 청백리로 오르고 부제학으로 추증되었다고 한다.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적으로는 경북 봉화에 성이성의 생가와 그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낸 계서당이 있다.

▲ 엄격한 유교의 신분질서 속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맞는 춘향을 그린 창극 '춘향실록-춘향은 죽었다'의 한 장면.<사진=국립민속국악원 제공>

춘향전의 시대 배경은 조선 19대 숙종 대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성리학적 교리가 더욱 엄중하게 지배하여 신분질서가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던 시절이었다. 이 질서에 반하는 비판이나 행동은 사문난적, 즉 성리학에서 말하는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이라 하여 죽임을 당했다. 엄격한 신분사회 질서 속에서 춘향전과 같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은 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춘향전은 여성의 정절과 수절을 강조했던 당시 사대부의 유교적 의식과 힘든 현실의 삶 속에서도 좀더 긍정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서민의식이 타협한 소설적 결과물인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 문화장르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없는 환상을 통해 위로와 환상을 전하기도 하고, 현실의 고단함과 씁쓸함을 신랄하게 반영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번 창극 ‘춘향실록-춘향은 죽었다’를 통해 판타지가 아닌 냉혹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가고자 한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