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1일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께서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인은 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존함을 한번쯤 들어 보았을 만큼 널리 알려진 예인이었다. 당시 명문고인 경기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여 수재라는 소리를 듣던 황병기 선생은 법학 공부보다 가야금 연주에 더 매진했다고 한다.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음악하는 이에 대한 편견을 깨려고 법대에 진학했을 뿐 본인은 가야금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 3학년인 1958년 KBS 전국 국악콩쿠르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예인의 길을 걸었다. 가야금 연주가이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고故 황병기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12월 사단법인 국학원이 개최한 국민강좌에 자리였다. ‘우리 전통 음악의 소리와 리듬’을 주제로 한 국학 강연과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의 연주뿐 아니라 전통음악에 관한 식견에 반했었다. 당시 국민강좌를 취재하며 쓴 노트를 다시 꺼내어 고인의 전통음악에 대한 깊은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     

▲ 고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연주 모습 <사진= KBS방송 캡쳐>

우리 전통음악의 소리와 리듬

  우리나라의 전통 음은 높낮이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사람의 조화가 생활 속에 그대로 녹아있는 삶 자체를 장단에 맞춰 부른 것으로 생활의 일부였다. 그래서 우리 전통음악은 서양과 다르고 동양의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우리민족만의 특유한 리듬을 갖고 있다.

  중국 ‘사기’나 위지 동이전에 보면 ‘동이족은 하늘에 제를 지내고 주야로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또 ‘한반도 남쪽에 고유한 현악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우리민족은 수천 년 전부터 이미 노래와 춤과 악기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 진흥왕 때 중국의 영향을 받아 가야국의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다. 진흥왕은 가야국을 정복하고 적국임에도 우륵을 모셔와 신라의 음악가를 가르치게 하고 발전시켜 계승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옛 현악기인 쟁(箏)이 있고 그 쟁을 변화시킨 게 가야금일 것이다. 그리고 소리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가야금을 가얏고라 하는데 거문고나 가얏고의 고를 한문으로 금(琴)이라 한다. 이 ‘고’라는 말은 신성과 통하는 말로 현악기를 부르는 고유의 명칭이었을 것이다. 우리 문화가 전래된 일본에서 모든 현악기를 ‘고’로도 부르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경주에서 출토 된 유물에는 진흥왕 이전시대의 가야금 조각이 나오고 가야금을 연주하는 흙 인형도 많이 나온다. 경주박물관에도 가야의 유물인 씨앗을 담아두는 목이 긴 항아리가 전시되어있다. 그 항아리에는 배부른 사람이 발가벗고 가야금을 타는 토우(土偶)가 붙어있고 그 연주자의 옆에는 나체로 된 남녀의 성교 모습이, 반대편에는 기어오르는 개구리의 발뒤꿈치를 물으려는 뱀이 있다. 가야금을 타는 토우는 신께 올리는 기도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일 것이다. 임산부형상은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성교모습은 다산과 조화를, 개구리와 뱀은 우주의 원리를 뜻하는 것으로 그 시대의 생활상이나 가치관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유물들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우리나라의 악기와 음악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예전엔 음악이라 하지 않고 악(樂)이라고 했고 선비들의 노래는 가곡이라 했고 서민들의 노래는 소리라고 했다. 악은 특수음악으로 궁궐이나 상류층에서 즐긴 음악으로 조선조 세종 때에도 박연이 만든 아악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오직 성균관대에서 봄, 가을에 지내는 문묘제례악(공자, 문성공 제사)만이 유일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가곡(歌曲)이라 하면 슈벨트나 홍난파, 현제명, 윤이상 같은 사람을 떠올리지만 옛날부터 선비들이 부르던 가곡이란 장르가 이미 있었다. 현재의 가곡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라 때부터 시조에 곡조를 붙여 부른 게 가곡이고 그 가곡 순서대로 옮긴 게 청구영언인 것이다. 옛 시조(詩調)집으로 익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김천택이 엮은 청구영언(靑丘永言)은 악을 즐기던 가사집이다. 청구는 동방의 푸른 언덕이란 뜻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키며, 청구영언은 시(詩)집이 아니라 그 당시(時)의 노래 가사를 기록해 놓은 시집(時集)으로 우리나라노래가사 모음 책(歌集)이다.  


 아이들은 모두가 오페라 가수

 

 우리나라사람들처럼 유달리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다. 잘하면 잘하니까 ‘노래 불러라.’ 늦으면 늦었다고 ‘노래 불러라.’ 신랑이니까 ‘노래 불러라.’ 신부가 ‘불러라’ ‘같이 불러라.’ 하면서 노래를 안 부르면 쳐들어간다고 윽박지르는 강압적인 노래까지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관광차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은 외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이렇게 생활의 일부가 된 노래란 무엇인가?


 ‘노래’라고 하는 것은 말을 길게 빼는 것이다. 다소 생소하고 무식하게 느껴진다면 영언(永言)이란 한자로 쓰면 유식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뜻, ‘말을 길게 뺀다’의 의미의 뜻에는 변함이 없다. 


  말을 길게 빼는 것은 잘 할까?
‘영이야 어디 있니?’ 이 말을 어린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여~엉~이~야아! ~~~~  어~~디~이~~인? 니이~~~~’ 한다. 이것이 영언으로 노래의 시작이고 오페라의 시작이다. 일반적인 말을 아이들은 노래로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어른들은 영언으로 하기는커녕 쑥스러워 하고 소용없는 짓이나 미친 짓거리로 생각한다. 어른과 아이의 생각차이다. 또한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탄력과 유연성에서 온다. 아이는 발가락이 이마에 닿을 정도로 몸이 유연하지만 어른들은 몸이 많이 경직되어있다. 몸만 굳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굳어진다. 유연한 사람들은 눈이 오면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르고 강아지처럼 좋아서 뛰고 놀지만 몸과 마음이 굳어있는 사람들은 눈은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젊은이들 하는 짓거리도 다 쓸데없이 한심스럽게만 보인다. 오히려 ‘눈을 언제 치우나, 미끄러져 다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는 쓸데없는 짓으로 보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그 쓸데없는 짓들이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말을 길게 빼보자.
동창이 밝았느냐 /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 상기 아니 잃었느냐/ 재 넘어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이 시의 ‘동창이’를 소리로 ♪‘동창~~~이〜〜 하고 도'음으로 이박을 빼고 4도를 내려가 ‘솔’음을 한 박 내어 세 박자 배수로 음을 낸다. 도에서 솔로 4도가 내려가는 곡조는 서양이나 중국, 일본 등 어느 나라든 다 있다. 그러나 서양의 곡조는 '도' 와 ‘솔’을 부를 때 음의 높이만 다르지 음의 본질은 똑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음은 소리가 길게 가다가 툭 떨어지면서 기(氣)가 쭉 깔려있다. 음도 앞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툭 떨어지면 낙상하기 쉽고 불쾌하기 때문에 떨어지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때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라 물방울이 툭 떨어지면 수면이 출렁출렁 번져나가듯 소리를 떤다.


  ♬‘동창~~~~~╯~이~╰〜〜〜〜’ 이 음의 높낮이에서 꺾어지는 음과 떠는 표현을 시김새라고 한다. 사람들은 국악이 왜 느리냐고 하지만 느릴수록 미묘한 시김새가 다 나온다. 떨어지기 전의 준비단계도 단번에 올리는 게 아니라 높게 비상하려면 할수록 도움닫기를 여러 번 하듯, 소리도 몇 차례 꼲아서 쑤욱 올린다. 그리고 쭈르륵 내려와서도 강렬한 열기를 서서히 삭혀내듯 떨림으로 끌어내린다. 명창의 소리는 마치 붓글씨를 쓸 때 획 하나에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넣어서 한일(一)자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의 필력을 볼 수 있듯이 음악에서는 시김새에서 그 사람의 모든 세계가 다 들어있는 듯한 공력(功力)을 맛볼 수 있다. 옛 선비들이 부른 가곡은 어른의 소리라 하여 이 공력 맛으로 들었다. 공력을 높이는 이 시김새는 '한'에서 나오고 한을 머금고 나오는 힘이 바로 우리 음악이 갖는 공력이고, 생명력이다. 

우리나라 소리는 시김새가 생명

  한을 머금은 가야금소리는 서민들이 좋아하는 소리중의 하나다.
가야금소리의 ‘징~~~’ 소리하나가 발생하여 툭 꺾이듯이 내려와 전혀 다른 ‘당〜〜〜’하는 음과 만나서 서로 빨려들 듯이 오르고 내리며 흙냄새가 나도록 가늘게 떨어지는 짜르르한 음은 사람의 애간장을 다 녹인다. 서양음악도 슬픔을 나타낼 때는 대립되는 두 음, ‘라’에서 ‘미’의 단조를 쓴다. 그러나 같은 4도의 대립되는 ‘라’ ‘미’의 곡조지만 우리 음은 한이 담긴 징~~~, 당~~~의 상반되는 음과 양의 소리와 박자 속에 삶이 녹아있어 더 슬프게 느껴진다.  


  삶에 한은 어떻게 쌓이는가? 가령 어느 서민이 무허가 주택에 살았는데 집이 헐렸다고 치자. 이때 사내는 술집에서 히히덕거리고 애들은 엄마 치마꼬리만 잡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 오로지 마당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사람은 아무 힘없는 지에미로, 지에미만 어쩔 수 없어 흐느낄 뿐이다. 한의 곡이란 이런 슬픔을 머금고 있다.


 가야금의 징~~~은 지에미의 음으로 떨어져있는 지애비의 음, 당〜〜〜을 찾아 가는데 징~~~ 당〜〜〜두음이 빨려 들 듯이 합쳐져 땅~~~하고 떨어지는데 삭신이 녹아들 듯 떨어진다. 시작은 지에미음이지만 준비단계를 하면 할수록 지에미음만 가는 게 아니라 시김새인 새끼 음이 업혀서 함께 쫓아가고 동생도, 동생새끼도, 줄레줄레 따라갈수록 더 슬프게 느껴진다. 인생을 살다보면 두 사람이 서로 만나고 있어도 슬플 때가 많은데 이 알 수 없는 슬픔이 한으로 쌓였으니 이런 서민생활이 그대로 반영되어 맺힌 음악은 순수한 시간예술로 승화되었다.


 우리 소리에서 박자는 우주 생명의 리듬 

  시간예술은 시간에 일정한 길이의 박을 매겨 아름답게 조직한 것이다. 시간을 일정한 단위로 쪼갠 것이 ‘초’(비트)나 ‘박’이라 하는데 이 ‘박’이란 말은 뛰는 것으로 생명을 뜻한다. 그래서 경혈을 잴 때 맥박이란 말을 쓴다. 이 세상에 나와 독립해서 뛰는 박은 죽을 때서야 비로소 멈추며 박이 수상하게 뛰면 아프다는 증거다. 시간과 음악도 다 박으로 이루어졌다. 박을 일정하게 묶으면 똑, 똑, 똑, 1박자로, 두개씩 묶으면 똑딱, 똑딱, 똑딱  2박자가 되고 이를 합친 게 4박자 식이다.

  시간에 자를 대고 볼펜으로 긋듯이 음의 비율을 1:1의 일정한 사이클(주기)로 만든 것이 서양음악의 기본박자이고 우리나라는 길었다가 짧게 ‘또옥 딱’ 또는 ‘똑 따악’하는 2:1의 비율을 합쳐 세 박자를 쓰는 게 기본이다. 생활에 배인 이 세 박자는 음악을 전혀 배우지 않은 장사꾼의 소리치는 말에서도 나타난다. 과일장수가 사과 배를 팔려고 소리칠 때 ‘사과, 배’가 아니라 ‘사과아~ 배’ 이렇게 가락을 붙여 외친다. 그러다가 단조로우면 뒤집는데 ‘배, 사과아~ ’하면 완벽하게 아름다운 리듬으로 바뀐다. 음악에 있어서는 이 뒤집는 데에 묘미가 있다. 그래서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것을 보고 ‘뒤집어지게 잘 한다’고 한다. 놀이판이 한창 고조에 달해 흥겨울 때 ‘뒤집어졌다’고 한다. 


  요즘 판소리가 인기가 많은데 서민들이 좋아하는 전통의 중심소리가 바로 남도소리이다. 민중의 소리, 진도아리랑의 박자도 되돌아갈 듯 엉켜 붙는 시김새의 연속으로 구성진 노래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음 음 음/ 아라리가 났네/문경새제♬ 왠 고갠가/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나네---♬  실제로 남도에 가면 누가 죽어서 울 때도 푸념하는 말 사이에 흐느끼는 대목이  따로 있다.


 “아이고! 마누라아!~~~~~ 고추따다장찍어밥퍼머그면맛있겠고하건마느은~ (으흑흑흑)하고 여기서 몸부림치고 운다. 이렇게 음이 딱딱 들러붙어서 온갖 찌들은 한의 기운이 삐져나오는 가락이 우리 소리의 묘미다. 


  장고소리도 맥은 똑 같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북들은 북의 면만을 치기 때문에 같은 음의 연속으로 웅장하긴 해도 깊은 맛은 없다. 우리의 장구를 보면 북의 왼쪽 면은 손바닥으로 치는 ‘궁’과 오른쪽은 채를 잡고 테를 치거나 면을 때리는 ‘덕’이 있다. ‘궁’과 ‘덕’ 두개를 합친 양의 소리는 ‘떵’이 된다. 길고 짧게, 짧고 길게 치는 박자를 ‘한 장단’ 이라하는데 이 소리는 음과 양이 조화롭게 구성된 가락이다. 음(-)과 양(+)의 결합으로 생명현상이 일어나는 생명체에서 양은 보조자 역할만 할뿐 음과 양이 만나서 창조하는 것은 항상 음의 몫이다. 그래서 중요한 음이나 첫 음은 언제나 음이 먼저 나온다. 우리나라의 소리는 이 생명의 원리가 바탕이 되어 만들어졌다. 


‘떵(길고) 덕(짧고) 쿵(짧고) 덕(길게) 
떵(길고) 덕(^) 쿵(짧고) 따르르르‘
이 음을 느리게 하면 염불이나 승무를 추는 음악이 되고 빠르게 하면 무당들이 많이 사용하는 굿거리장단이 된다. 


  이렇듯 우리장단의 근본은 생명이 약동하는 리듬으로 우리음악은 생명의 기쁨인 생명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표현의 특징이 한을 잔뜩 집어삼키고 삭혀내는 시김새이다. 기운이 응축된 시김새를 통해 생명의 환희를 예술로 승화시킨 소리가 진정한 기쁨으로 감동적이다.
예를 들면 금메달을 따면 눈물이 핑 돈다. 좋은데 왜 우는가? 슬퍼서 운다. 금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은 뱃속에 쌓인 슬픔이 굉장하다. 그 굉장한 슬픔을 씹어 먹으면서 복받치는 희열이 진짜 기쁨이다. 슬프면서도 기쁜, 우리음악은 바로 이런 한을 집어먹고 뱉어 내는 희열의 기쁨인 것이다. 


  우리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힘이 넘쳐나는 생명의 희열이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서,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에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에서 생명력을 강하게 느끼듯 그 생명력과 평화적인 힘을 나타내려는 게 우리음악의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