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4세에 글로벌사이버대학교에 최고령 수석합격을 하고, 작년에 81세의 나이로 감정노동관리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첫 강연을 했으며, 올해 82세에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뇌교육학과 석사과정에 입학을 앞둔 심윤식 씨. 1937년에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청소년기에 6·25전쟁을 겪었다. 인생 전반기를 격동적인 20세기와 함께 열심히 살아내고, 이제 세기의 경계를 넘어 21세기에 새로운 희망과 도전으로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고 있다. ‘고령사회의 인생 모델’이라고 부를만한 그를 만나 끊임없는 새로운 선택과 도전을 가능케 한 힘에 관해 들어보았다.

▲ 올해 82세인 심윤식 씨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뇌교육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심윤식 씨는 2010년 74세에 글로벌사이버대학교에 최고령으로 입학하여 학교를 마쳤다. <사진=김경아 기자>

 

▶ 작년 6월에 글로벌사이버대학교가 한양대학교 병원에서 <감정노동 365 캠페인>과 <감정노동 심신힐링 뇌교육 강연>을 할 때 취재차 갔다가 진행하시는 모습을 멀리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감정노동 관리지도사 교육을 받고 활동할 때였어요. 2015년에 제 모교인 글로벌사이버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병원이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지원으로 감정노동자를 위한 심신힐링 뇌교육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감정노동 관리지도사 교육과정을 운영하여 뇌교육으로 감정노동자들의 심신힐링에 도움을 주는 직업을 만들었어요. 저는 감정관리는 감정노동자뿐만 아니라, 주부와 노인, 어린이들 모두에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구나 싶어서 선택했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막내딸이 직장을 다니는데 힘들어서 그런지 아이에게 소리 지르는 것을 봤어요. 워킹맘의 고달픔을 느꼈어요. 그래서 내가 감정노동 관리교육을 받아서 딸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온라인으로 20강을 듣고, 오프라인으로 8시간 수업을 들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온라인 수업을 3번 더 들었습니다. 그 공부를 하면서 감정노동 힐링 캠페인에도 참석하고, 감정노동자를 위한 뇌교육 강연도 진행하고 그랬어요.

 

자격증을 취득한 후 직접 강의를 해 봐야겠다 싶어서, 관악구의 한 경로당에서 노인 대상 실습을 했어요. 전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참석한 분들에게 맞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동네 분들과 수다를 떨듯이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쉬운 동작으로 뇌교육 체험 수련을 했어요. 제 또래 분들이라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요즘은 아파트 경로당에 1주일에 두 번씩 가서 뇌교육 체험 수련지도를 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힘이 닿는 한 꾸준히 활동할 겁니다.

 

▶ 일제 강점기 때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데 어떠셨어요?

 

가장 오랜 기억은 네 살 때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살 때였어요. 그때 일본이 쌀을 다 공출해가서 먹을 것이 없어서 콩깻묵을 배급받았어요. 콩은 기름을 짜서 비행기 연료로 쓰고 콩깻묵을 배급했었어요. 그걸로 어머니가 밥으로 해 주는데, 입에 들어가면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꺼끌꺼끌해요. 그래서 어머니 앞에서는 먹는 척하고 밖에 나가서 뱉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제가 걷지를 못하게 되었어요. 영양실조였던 것 같아요. 잘 걷지 못하고 몇 발자국 걷다가 쓰러지니까, 당시 동생을 배서 만삭이던 어머니는 애가 탔어요. 동네 아주머니에게 어쩌면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 아주머니는 “사람 구실 못할 것 같으니까, 한이라도 없게 이밥(쌀밥)이라도 먹이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어렵게 쌀을 구해서 밥을 해주셨는데 씹지 않아도 그냥 넘어갔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운동시킨다고 내가 안 넘어지게 줄을 묶어서 동네를 돌며 걷게 했어요. 세 바퀴 정도 돌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한 달을 먹고 운동하니까 안 넘어지고 잘 걷게 되었어요. 저는 걷지 못한 이유가 콩깻묵을 안 먹고 버려서라는 걸 알았지요. 그때부터는 아무거나 다 잘 먹었어요. 생존본능이 발동한 거지요. 지금도 음식 남기지 않고 잘 먹어요.

 

▶ 이북에서 사시다가 언제 춘천으로 내려오셨어요?

 

진남포에 살다가 광복되기 전에 내려왔어요.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이사를 자주 다니셨어요. 인천에서 1년 살다가 춘천으로 왔어요. 5남매 중에 장녀이고, 동생들하고는 4살 터울이에요. 여동생 둘, 남동생 둘. 막내 여동생이 6.25 전쟁 휴전하고 나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바쁘고, 어머니는 몸이 약하여 동생들 돌보는 것도 힘들어하셨어요.

 

초등학교를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갔어요. 친구들과 같이하는 놀이도 잘 몰라서 학교 가니까 뒤처지는 게 많았어요. 장녀라서 누가 알려주지를 않으니까 공기놀이, 고무줄 뛰기, 사방치기 이런 것도 잘하지 못해요. 친구들이 잘 못 한다고 놀이하는데 안 끼워줘요. 그래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라도 하려고, 운동장 한 귀퉁이 모래밭에서 혼자 연습을 했어요. 수업 시작한 줄도 모르고 한참을 혼자 하다가 보니까 운동장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교실에 들어갔더니 선생님이 뭐하다가 이제 들어오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공기 연습하다가 늦었다고 하니까 기가 차서 웃으시며 그냥 들어가라고 했어요. 언니, 오빠하고 놀면서 배우는 것을 학교 가서 배우려니까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성격이 되었나 봐요.

 

▶ 중학교 다닐 때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까?

 

예, 그때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여학교(중학교)를 가는 학생은 한 반에 열 명도 안 됐어요. 요즘은 3월에 입학하지만, 그때는 중학교를 6월에 입학했는데, 며칠 안 지나서 전쟁이 났어요. 영어 시간에 알파벳 스무 번 써오라고 해서 그 숙제하고 있는데 6.25 전쟁이 났어요. 어머니가 피난 가야 한다고 빨리 나오라고 해서 책가방 들고 교복까지 입고 쫓아갔어요. 곧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피난을 부산까지 갔어요. 걸어서 대전까지 가서 거기서 석탄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어요. 한 달 걸렸죠.

 

피난 가는 길에 사람들이 피난민한테 김밥을 줘요. 근데 엄마는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런걸. 못 받으러 가세요. 제가 가서 하나 받아오면 동생들이 많은데 부족하잖아요. 얼른 다시 가서 받으려고 하면 왜 또 왔냐고 핀잔을 해요. 그러면 어머니도 있고, 동생들도 줄줄이 있어서 더 받아야 한다고 떼를 쓰고 울고 그랬어요. 그때는 그게 생존이었어요. 나는 TV에 아프리카 난민들 굶주리는 거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요. 내가 겪은 일이고. 우리가 6.25 전쟁 때 그렇게 살았어요.

 

▶ 피난 생활의 고생이 말로 다 할 수 없었겠습니다.

 

예, 정말 고생이 심했어요. 9.28 수복되고 다시 춘천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가 김장김치까지 담갔어요. 근데 얼마 안 있어서 또 피난을 가야 한대요. 이번에는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까지 와서 다시 인천으로 가서 배를 탔어요. 부산 가는 배를 탔는데, 부산항에는 흥남에서 큰 배를 타고 온 피난민이 많다고 배를 정박을 안 시켜줬어요. 이제 우리는 바다에 다 빠져 죽는가 보다 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어요. 그랬더니 우리가 탄 배를 제주도로 보낸 거예요.

 

그때 제주도는 진짜 황무지였어요. 아버지는 공무원이라 도청을 따라 다녔고, 우리만 제주도에 온 거예요. 피난민 가족들이 방 하나씩 얻어서 세를 살아서 한 집에 여러 가족이 살았어요. 어머니는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니까 제가 벌이를 해야 하는데. 어려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새벽 4시에 항구로 나가서,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에게 담배와 성냥을 팔았어요. 작은 목판에 담배와 성냥을 올려서 들고 다녔어요. 군인들이 많이 내렸는데 아가씨들한테 가서 사고, 저 같은 어린 여자애한테는 안 와요. “사 주세요. 사 주세요.” 해도 안 와요. 근데 나이가 들고 계급이 높아 보이는 군인 아저씨가 제 것을 사줘요. 그리고 부하 군인들을 불러서 제 것을 사게 하셨어요. 그런 분이 꼭 한 분씩 있어서 도와주셨어요. 그래도 아가씨들은 8시면 끝나고 집에 가서 아침밥을 먹는데, 나는 10시가 되어서 들어갔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어디서 놀고 오냐고 했어요. 그렇게 피난살이를 했어요.

 

▶ 전쟁 끝나고 다시 춘천에 있는 학교로 돌아갔습니까?

 

춘천에 3년 만에 오니까 친구들은 모두 2학년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때 학교 건물이 다 타고 천막에서 수업할 때였어요.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1학년부터 다시 하래요. 1학년을 싫다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막 울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틀 뒤에 2학년 기말시험인데 칠 수 있겠냐고 해서 할 수 있다고 하니까 2학년 기말시험 치르고 3학년부터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셨어요. 중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또 부모님이 장녀라고 고등학교를 보내주셔서 춘천여고에 들어갔어요.

 

▶ 여고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셨지요?

 

여고 졸업반 때 춘천에 한국은행 지점이 생겼어요. 시험을 쳐서 합격했어요. 합격통지를 받고 첫 신입사원 모임에 갔어요. 나는 정시에 갔는데, 몇 사람이 늦었어요. 그때 대리라는 사람이 말했어요. "12시에 출발하는 기차가 5분 후에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철로 위를 달리고 있겠지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때 시간을 꼭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회생활을 첫 번째 원칙이 제 머릿속에 새겨진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 원칙을 지키는 버릇이 있어요.

 

한국은행을 다니면서 돈을 모았어요. 대학을 가려고요. 꼭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취직하고 얼마 안 돼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주위에서 아버지가 재혼해야 하는데 큰딸이 시집을 가야 재혼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난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압박이 심했어요. 남자를 소개해 주면 일부러 자장면을 시켜서 고춧가루를 뿌려서 입에 묻혀가며 먹었어요. 그러면 다시 만나자고 안 한다고 해서요. 그러다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서, 아버지가 소개해 준 남편을 만나서 결혼했어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 좋으냐고 물었는데, 부끄러워서 그냥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고 했더니, 공무원을 소개해 주셨어요. 대학에 가는 꿈은 그렇게 사라진 거지요.

 

▶ 스물네 살에 대학의 꿈을 접고 주부가 되신 거네요.

어릴 때 제 가슴엔 빨간 촛불이 타고 있었어요. 은행에서 돈을 셀 때도, 집에서 일할 때도 빨간 불이었는데, 대학가는 꿈을 버리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사니까 하얀 촛불이 되어 버렸어요. 빛을 잃어버렸더라고요. 그렇게 살았어요. 공무원 박봉으로 생활하고 딸 넷을 낳아 키우느라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았어요.

 

그래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살아있었어요. 춘천에 있는 여성회관에서 여러 가지를 무료로 배울 수 있었는데 양재, 편물, 서예를 거기서 배웠어요. 그때 조화가 인기가 많아서 배우려고 하니까 그건 수업료를 내야 했어요. 비싸서 엄두를 못 내다가 주위에 배우고 싶은 주부들이 많아서 회비를 10명이 나눠서 내고, 내가 대표로 가서 배워와서 가르쳐 주었어요. 그리고 열심히 만든 작품들을 함께 전시회를 열어서 팔고, 그 수익금으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서 방송에도 나갔어요.

 

그랬더니 시청 공무원이 찾아와서 부녀교실에 대표로 나가달라고 하는 거예요. 몹시 어려울 때 저의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자기도 나를 돕고 싶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여러 번 권해서 하는 수 없이 참석했어요. 강원도 전체에서 부녀교실 대표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데, 예쁜 원피스를 입은 성심여대 여교수가 강연에서 앞으로 우리나라가 부자나라가 된다는 거예요. 40년, 50년 뒤의 여러분을 상상해보래요. 그때를 생각하고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거예요. 미국 사회에 관해 이야기도 해 줬어요. 나는 평생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는 겁니다.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걸 처음 들은 겁니다. 그때부터 부녀단체 교육도 열심히 참석하고, 부녀회장도 열심히 했어요.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가 살아났던 것 같아요.

▲ 작년에 81세의 나이로 감정노동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한 심윤식 씨가 감정관리를 주제로 첫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글로벌사이버대학교>

▶ 50년 만에 결국 대학입학의 꿈을 이루셨네요.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수필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냥 마음에만 품고 있었어요. 70이 넘으니까 대학입학이나 수필가는 엄두가 안 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손녀가 글로벌사이버대학교에 입학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할머니도 같이하자고 그래요.

 

처음에는 “이 나이에?” 하다가 한번 해 보자 했어요. 전공은 스토리텔링 학과를 선택하고, 합격까지는 기대를 하지 않고 원서를 냈는데, 최고령 수석합격자로 해서 너무 놀랐어요. 입학 동기인 손녀는 글로벌사이버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나와서 지금은 데이터베이스 관련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제가 컴퓨터를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지금도 원격으로 해결해 줘요.

 

▶ 74세의 나이에 입학해서 4년간 사이버대학교에서 공부하신 이야기를 해 주세요.

 

글로벌사이버대학교에서 52과목을 들었어요. 계절학기까지 들었어요. 온라인으로 수업도 듣고 시험도 쳤어요. 그냥 수업만 들은 게 아니고, 52과목을 공부하면서 과목에 대해서 내가 느낀 걸 글로 썼어요. 몰랐던 것도 솔직히 쓰고, 배우고 느낀 점도 쓰고요. 졸업할 때 손애경 교수님께 드렸지요.

 

내가 이 학교에 다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온라인으로 강의 듣고 시험을 치는 건 이제 익숙해요. 4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정말 뿌듯했어요. 남편이 꼭 졸업 축하를 해 주고 싶다고 해서 몸이 불편한 남편을 휠체어에 태워서 졸업식에 함께 갔어요. 남편이 선물하는 졸업 축하 꽃다발을 받았습니다. 선택한 꿈이 이루어진 첫 경험입니다.

▲ 심윤식 씨는 100살, 120살까지 꿈과 목표를 가지고 주위와 세상에 도움이 되면서, 스스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인생을 완성하자는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의 메시지가 80대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사진=김경아 기자>

 

▶ 대학 졸업 후에 3년간 활동의 공백기가 있으셨네요.

 

3년 동안 남편 병시중했어요. 2016년에 곁을 떠났어요. 남편하고 살던 집을 정리하고 지금은 막내딸 집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요. 직장 다니는 막내딸 도울 겸해서 아침, 저녁으로 손주 식사 챙겨주고 돌봅니다. 낮에는 1주일에 세 번씩 브레인센터에 와서 수련합니다. 동탄에서 여기까지 버스 타고 오려면 멀어요. 특히 서울 시내에서 많이 막혀요. 그래서 안 하던 지각도 가끔 하는데요. 딸이 그래요. “엄마, 요즘은 연세 드신 분이 자가용 타고 다니는 것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멋있다고 생각해요. 건강하다는 증거고 자기관리를 잘 하시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해요. ” 그 말에 힘을 더 얻어요. 건강에 도움도 되고 지구환경에도 도움이 되니까 열심히 대중교통 이용하고 걸어 다녀요.

 

▶ 올해 대학원 입학이라는 새로운 선택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저는 17년 동안 이승헌 총장님의 책을 꾸준히 읽었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작년에 이승헌 총장님이 쓰신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는 책을 읽었어요. 그동안 쓰신 책들의 총정리, 족보라고 느꼈어요. 처음에는 무심히 읽었는데, 점점 읽을수록 좋아서 내리막길을 한숨에 달려가듯이 책을 단숨에 끝까지 읽었습니다.

 

총장님이 말씀한 120세 인생이 나에게는 멀지 않게 느껴져요. 곧 90살이 되고 100살까지 살 가능성도 커요. 사는 날까지 어떤 목표를 갖고 무얼 하면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100살, 120살까지 꿈과 목표를 가지고 주위와 세상에 도움이 되면서, 스스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인생을 완성하자는 총장님의 메시지가 80대를 살아가는 저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어요.

저는 <법화경과 우리의 삶>이라는 사이트를 오랫동안 운영해 오고 있었어요. 이승헌 총장님의 저서를 읽고 또 내 삶을 돌아보고 느낀 나눔 들을 글로 써서 다른 분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총장님의 책이 120세 인생이라는 새로운 선택과 도전을 하게 하는 힘이 되었어요.

 

▶ 얼마 전에 뉴질랜드 여행 다녀오셨다고요.

 

재작년 겨울에도 다녀오고, 올해 1월 초에도 명상여행을 다녀왔어요. 버스 안에서 졸다가 하루루 지구시민연수원에 도착했는데 여행을 간 것이 아니고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었어요. 마음이 편안해서 그런지 이번에는 뉴질랜드의 자연과 마오리족의 문화까지 그 의미와 가치가 그대로 느껴졌어요.

 

이번에 얼스빌리지에서 120계단을 걸어봤어요. 120계단을 만들게 된 이야기를 들었는데 감동적이었어요. 이승헌 총장님이 처음부터 120계단을 하려던 게 아니고, 원시림의 숲길이라 미끄럽고 경사가 심해서, 명상여행자들이 다칠까 봐 계단을 만들어서 편안하게 다니게 하려는 배려로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계단을 그냥 계속 오르면 불편하니까, 명상을 하면서 천천히 오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중간 60계단 지점에는 넓은 쉼터 공간이 있어요. 다시 60계단을 더 만들어서 120계단이 되었어요. ‘120세 인생을 위한 명상’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코자 마음을 쓰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60계단 올라가서 쉬는 자리에서 한번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쉰 다음에 다시 올라갑니다. 100계단에 가서는 계단 폭이 널찍해요. 나이가 100살쯤 되면 걷기가 힘드니까 폭을 넓혀 놓으셨다고 생각했지요. 120계단까지 올라가면서 작은 것 하나하나에서 명상여행자들을 위한 총장님의 세심한 배려를 느꼈고 감동도 받았습니다. 제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은 매년 한 번씩 명상여행을 가고 싶어요

 

이번에 총장님이 주시는 ‘홍익인재상’을 받았어요. 제가 글로벌사이버대학교를 졸업하고 뇌교육을 알리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시며, 120세 인생의 모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홍익인간으로서 제 몫을 열심히 하고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먹었어요.

 

▶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1주일에 세 번은 브레인센터에 가서 뇌체조하고 명상을 해요. 그리고 집에서 뇌파진동을 매일 30분씩 합니다. 물구나무 서기 연습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짬짬이 계속 움직이고 수련합니다.

 

▶ 대학원에서는 어떤 공부, 연구를 하고 싶습니까?

 

뇌교육학과에서 뇌교육과 뇌건강을 전공하려고 합니다. 대학에서 ‘뇌교육의 이해’라는 과목도 공부했지요. 중년에 했던 30년 동안 불교공부를 원리적으로 했다면, 지난 10년 동안은 원리와 체험을 포함한 체율체득, PDCA(Plan-Do-Check-Action)가 가능한 최첨단의 뇌교육을 공부했어요. 뇌교육 석사과정을 통해서 그동안 공부한 것을 융합하고 싶습니다.

▶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80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이승헌 총장님의 저서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를 읽으면 누구나 꿈이 생기고 활기가 나니까 꼭 읽어보라고 말하겠습니다.

 

▶ 입학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석사 학위 받으실 때 다시 한번 인터뷰 청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