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우리를 포함한 다른 민족의 바람과 달리 핵실험을 6차례나 강행하고, 미국을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정도로 안보위기가 심각해진 상황이다. 예전부터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세력이 만나는 중간지점에 있어 주변 국가들이 다투면 하는 수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이를 역이용하면 주변 국가들을 중재하고 조율하는 평화와 번영의 중심축 즉, 허브(hub)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허브의 역할을 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남북이 분단되더라도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통일이 되어 우리 민족의 발전과 번영은 물론, 주변 국가들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12일 서울시청 시민청 바스락홀에서 열린 제170차 국민강좌에서 홍양호 전 통일부 차관(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우리나라의 현 외교 상황에 관해 말하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평화 통일'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날 '분단국 통일사례를 통해 본 통일의 교훈'이라는 주제로 시대적 과제로서 우리 눈앞에 생생히 다가오는 남북한의 통일 문제에 관해 어떻게 하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평화적이며 안정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을지, 베트남·예멘·독일 통일 사례를 분석하여 그 길을 모색했다. 

▲ 지난 12일 서울시청 시민청 바스락홀에서 열린 제170차 국민강좌에서 홍양호 전 통일부 차관(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이 '분단국 통일사례를 통해 본 통일의 교훈'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황현정 기자>

우선 베트남은 1975년  무력으로 통일되었다. 당시 월남 지도층은 부패와 국론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장기적으로 지속된 베트남전쟁에 의해 미국 내 반전 분위기와 피로감으로 미군이 철수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통일 이후 베트남에는 국토의 황폐와 생산시설의 파괴, 수많은 인명피해가 일어났으며, 주민 간 적대감이 증폭되고 강압적인 공산사회로의 통합으로 약 100만 명의 'boat people'이 발생했다. 통일베트남이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태가 지속되자 주민의 불만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결제 문제 해결을 위해 베트남 정부는 1986년 '도이모이(doimoi)' 정책(쇄신정책)을 펼치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경제회복과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예멘은 당시 남북 예멘 간 경계선 지역에 유전(油田)이 많아 통일될 시 경제적 부를 증대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의 중재하에 1989년 정상회담을 열어 통일헌법안에 합의 후 1990년 합의통일 했다. 이로 인해 남북 예멘 간 권력 배분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북예멘은 대통령, 국방부장관 등을 남예멘은 부통령, 총리, 내무장관 등을 맡게 되고 군대 또한 정, 부책임자를 나뉘어 맡게 되었다.

그러나 관료나 군인의 명령계통과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고 의사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이슬람 율법 적용문제, 일부다처제 문제, 여성의 사회활동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관해 사사건건 갈등이 이루어져 사회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경제 발전도 제대로 이룩하지 못했다. 이는 반정부 시위 노동자 파업 주민 폭동 등 사회 혼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남북 예멘은 다시 분리되었다. 그 이후 북예멘이 무력으로 남예멘을 제압하며 다시 통일되었다.

독일의 경우 세계 1·2차대전 발발국으로 국제사회법상 주변 국가들의 동의가 없으면 통일을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동서독의 합의를 거쳐 이루어낸 평화통일이다. 독일 통일은 동독 정권의 강압적 감시와 통제에  불만·항거와 서독의 자유·민주·풍요·복지를 희구한 동독주민들의 민주·평화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급변사태의 통일이었으며, 이 사태를 통일 기회로 판단한 콜 총리를 비롯한 서독 지도층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루어냈다.

그러나 갑자기 닥쳐온 통일인 만큼 후유증도 컸다. 구동독 자산가치 평가 오류로 막대한 통일 비용이 지출됐으며 동서독화폐 교환비율을 1:1로 함으로써 동독기업의 경쟁력 상실로 인한 파산과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또한, 동독주민들의 안정과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복지비용이 과다 지출되었고 동서독주민간의 갈등이 초래되었다.

그런데도 독일통일은 강력한 리더십, 헌신적인 공직자들의 노력, 서독의 튼튼한 경제력과 국민의 통일비용 부담 등으로 후유증을 잘 극복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낸 모범적인 성공사례이다. 서독의 적극적인 통일외교와 선제 통일방안 및 화폐·경제·사회통합조약 제시는 독일 통일을 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외에도 동독주민들이 자유와 풍요를 바라면서 강력한 서독체제로의 편입요구가 촉발제 역할을 했다.

▲ 홍양호 전 통일부 차관은 이날 강연에서 "정치적, 경제적 통일도 중요하지만, 사전에 사회통합을 위해 높은 관심과 대응책을 마련하여 통일이전이나 이후에 사회통합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황현정 기자>

홍 전 통일부 차관은  "세 국가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첫째, 어떤 종류의 통일이든 결국 힘의 우위에 있는 쪽이 통일을 주도하게 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높은 경제력, 튼튼한 국방력과 단결된 내부 통합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통일 이후의 갈등과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이산가족 교류 ▲인도적 지원 ▲다양한 교류 협력 등 사전에 교류와 협력이 많아야 한다. 셋째,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을 설득할만한 외교 능력을 갖춰야 한다."라며 세 가지 사례로 본 시사점과 교훈을 제시했다.

끝으로 홍 전 통일부 차관은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주민들이 스스로 남한에 와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정치적, 경제적 통일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통합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민족끼리 마음의 통합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 제171차 국민강좌는 10월 11일 오후 6시 30분부터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이날 김태희 다산연구소 원장이 '다산 정약용, 조선에 새길을 열다'를 주제로 강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