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 와이탕이 조약체결지 방문자센터 기념품 판매처에는 마오리문화, 뉴질랜드 역사책 말고도 다른 책이 여러 권 있었다. 그 중에 관심을 끈 게 제임스 쿡(James Cook, 1728~1779) 관련 책들이었다. 쿡 전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내용을 다룬 책들이었다. 이런 책들이 이곳에 있다니 제임스 쿡이 뉴질랜드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제임스 쿡은 태평양 해역의 실체를 밝힌 성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험 항해가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특히 괴혈병 치료법을 확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럽인으로는 아벌 타스만에 이어 두 번째로 뉴질랜드에 온 그를 뉴질랜드의 '재발견자'라고 한다.

▲ 뉴질랜드 와이탕이 조약체결지 방문자센터에는 제임스 쿡 관련 책을 여러 종류 판매한다. 쿡은 유럽인으로 뉴질랜드를 '재발견'한 탐험 항해자였다. <사진=정유철 기자>

영국은 18세기 후반 제임스 쿡에게 세 차례 대규모 탐험 항해를 지시했다. 제임스 쿡은 1768년 영국해군이 조직한 탐험대를 이끌고 범선 에데버 호 선장이 되어 항해에 나섰다. 이 항해를 제임스 쿡의 1차 항해라고 부른다.  제임스 쿡의 항해는 금성 관측이 목적이었다. 금성은 여러 해 한 번씩 지구와 태양 사이를 가로지른다. 이때 태양의 일부가 금성에 가려지는 '금성의 식蝕' 현상이 생긴다. '식'의 지속 시간은 지구 표면의 어느 지점에서 관측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런던 왕립협회는 남서 태평양에서 이를 관측하기로 결정했고, 제임스 쿡이 선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1768년 영국을 출발해 이듬해 타히티에서 금성의 식을 관측하고, 태평양의 여러 섬을 답사한 뒤, 호주와 뉴질랜드에 들렀다, 1771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1769년부터 제임스 쿡 선장은 3차례에 걸쳐 뉴질랜드 해안선을 정밀 조사하였다. 쿡은 이곳이 남극땅이 아니고 마오리가 주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뉴질랜드가 남북으로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이에 따라 뉴질랜드 남섬과 북섬 사이의 해협을 쿡해협이라 부르게 되었다. 1770년 제임스 쿡은 현재의 시드니 남쪽 근처의 보타니만에 상륙하여 이곳을 영국령 뉴사우스웨일스(남반구의 새로운 웨일스)라고 선언했다. 근대 오스트레일리아의 시작이었다.

1772~1775년 제2차 항해 때는 해군성의 명령으로 남방의 미지대륙을 찾아 남극권까지 항해해 들어갔으나 남극대륙을 찾지 못했다.

1776년 2월 3차 항해를 시작한 제임스 쿡은 오스트레일리아 테즈메니아 섬을 거쳐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선원들이 원주민 마오리를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마오리와 교류 관계를 유지하였다.

세 번의 항해 중 쿡 선장은 뉴질랜드에 네 차례 방문하여 328일을 뉴질랜드 해안이나 인근에서 보냈다. 그러는 동안 원주민 마오리와 교역이 이루어져 영국인들은 채소, 특히 감자와 튜립을 전파했다. 감자는 마오리의 주식으로 경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무기를 빼놓을 수 없으니 머스킷총도 마오리에게 전해져 나중에 마오리 부족간에 ‘머스킷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쿡 선장의 이후 뉴질랜드에는 영국과의 교역과 유럽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목재, 아마, 물개, 고래에 관한 쿡 선장의 보고서는 즉각 영국인들의 뉴질랜드에 관심을 촉발하였다. 이는 18세기후반부터 19세기까지 약탈경제로 이어졌다.

제임스 쿡은 자신이 탐험한 땅에 현지 지명을 무시하고 영어식 지명을 붙였고 그곳의 문물들을 대영제국의 재산목록에 등록하거나 영국인들에게 목록의 소유권을 나눠 주는 일을 했다. 쓰지하라 야스오의 《지명으로 알아보는 교실 밖 세계사》(혜문서관, 2005)를 보면 제임스 쿡이 어떻게 이름을 붙였는지 자세히 나온다. 1778년 하와이에 도착한 쿡은 이 섬의 이름을 샌드위치라고 붙였다. 당시 영국 해군 총사령관이자 탐험항해의 후견인이기도 했던 존 몬택 샌드위치가의 4대 백작의 이름을 섬에 붙였다. 도박을 매우 좋아했던 백작은 게임을 하면서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인 샌드위치를 고안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샌드위치라는 섬 이름은 1810년 섬 전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대왕이 본인의 출신지를 섬 이름으로 제안하여 하와이로 바꾸었다. 뉴질랜드령 쿡제도도 쿡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기념품 가게에서 쿡 관련 책을 보는 동안 이런 내용이 떠올라 상쾌하지 않았다.

뉴질랜드로 출발하기 얼마 전에 읽었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김영사, 2015)에서 언급한 내용도 상기되었다. “뱅크스와 왕립협회는 구입할 수 있는 최신의 과학장비를 갖췄고, 탐험대는 경험 많은 뱃사람이 동시에 뛰어난 지리학자이자 민족지民族志 학자인 제임스 쿡 선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탐험대는 1768년 영국을 출발해 이듬해 타히티에서 금성의 식을 관측하고 태평양의 여러 섬을 답사한 뒤, 호주와 뉴질랜드에 들렀다 1771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막대한 양의 천문학, 지리학, 기상학, 식물학, 동물학, 인류학 자료를 싣고 귀국했다.[…] 쿡은 자신이 ‘발견한’ 수많은 섬과 육지에 대해 영국의 소유권을 주장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호주였다. 쿡의 탐사대는 영국이 남서태평양을 점령하고, 호주, 태즈메이니아, 뉴질랜드를 정복하고, 수백만 명의 유럽인이 새로운 식민지에 정착하며, 그곳의 토착문화를 파괴하고 원주민 대부분을 박멸할 기초를 닦아주었다. 쿡의 탐사로 인해 다음 세기에 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은 가장 비옥한 땅을 유럽 정착민들에게 빼앗겼다. 원주민의 수는 90퍼센트 가량 줄었고 생존자들은 인종차별적인 가혹한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호주 원주민과 뉴질랜드 마오리족에게 쿡의 탐사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시작이었다.”

쓰지하라 야스오는 제임스 쿡을 "‘태평양 항해의 왕’이라는 칭송과 함께 냉정하고 우수한 과학자로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추진했던 측근 중의 한명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평가했다.

"쿡의 배는 군대의 보호를 받은 과학탐사대였을까, 아니면 소수의 과학자가 따라붙은 군사원정대였을까? 이것은 연로통이 반쯤 찾는지 반쯤 비었는지를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둘 다에 해당한다. 과학혁명과 현대 제국주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제임스 쿡 선장과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 같은 사람들은 과학과 제국을 거의 구분하지 못했다."(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뉴질랜드 원주민의 이런 역사를 알면서 우리 모두 지구시민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국민이 지구인으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구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진다.  우리는 지구시민이다. 모든 인류의 행복과 아름다운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지구에 온 지구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