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고대사 전쟁속 연오랑·세오녀 계통의 전승이 갖는 가치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앞서 살펴본 바, 『일본서기』 중에 실린 천일창·적옥녀 관련 기록과 매우 흡사한 기록으로 의부(意富)가야(임나(任那)가야) 왕자 아라사등(阿羅斯等,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 소나기시치(蘇那曷叱知), 우시기아리시치긴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백석녀(白石女) 전승도 있다. 
천일창·적옥녀 전승의 서사 구조와 아라사등·백석녀 전승의 서사 구조는 너무나 흡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천일창·적옥녀 전승과 아라사등·백석녀 전승을 동일 전승의 이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측면들을 곰곰이 비교해 볼 때 동일 전승으로 보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후대의 어느 시점에 양 전승이 하나로 습합되어 동일 전승의 이형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일단 아라사등·백석녀 전승을 소개한 후 아라사등의 출신국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천일창·적옥녀 전승과 아라사등·백석녀 전승이 왜 동일계열의 전승으로 묶이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해 보겠다. 더하여 현재 한·일간에 고대사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천일창·적옥녀 전승이나 아라사등·백석녀 전승과 같은 연오랑·세오녀 계통의 전승들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잠시 짚어 보겠다. 


 종래 아리사등 전승에서 가장 주목되어왔던 부분은 천일창 기록과의 관련성 문제보다는 오히려 아라사등의 출신국으로 나타난 의부가야(임나가야)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 기록은 근대 이래 한·일 양국간 역사논쟁의 중심에 놓인 임나일본부 논쟁의 첫머리를 여는 기록으로 중시되어왔다. 여기에서 임나일본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는 어렵지만, 임나가야의 원류에 관한 이해는 가능하다. 아라사등은 천일창 왕자와 동시대 인물이며, 활동 지역도 같기에 천일창에 관한 인식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아라사등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스진천황(10대 천황) 65년 7월조에 나타난다. ‘임나국이 소나기시치(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조공했다. 임나는 츠쿠시국(筑紫國, 큐슈 후쿠오카 지역에 있던 소국)과 2천 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깊고 험한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鷄林, 신라) 서남방이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에 이어 스이닌천황(11대 천황) 2년조에 재차 기록이 나타나는데, 내용이 더욱 자세해졌으며 천일창·적옥녀 전승과 흡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아래와 같다. 

임나인(任那人) 소나가시치(蘇那曷叱知)가 자기나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선황(先皇)대에 내조(來朝)하여 여태 돌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소나가시치에게 상으로 붉은 비단(赤絹) 1백필을 하사, 돌아가 임나왕(任那王)에게 주게 하였다. 신라인이 길을 막고서 그것을 빼앗으니 이때부터 양국의 원한이 생겨났다.
〇 일설(一說)에 의하면, 미마키(御間城: 스진(崇神)천황) 치세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額有角人)이 배를 타고 월국(越國: 현 와카사만 일대)의 게히우라(笥飯浦: 氣比浦)에 정박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쓰누가(角鹿)'라고 했다. 그는 ‘오호가라쿠니(意富加羅國) 왕자로 이름은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이며 또 우시기아리시치긴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고도 한다. 일본국에 훌륭한 천황이 있다고 전해 듣고 귀화하려 한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처음에 아나토문(穴門, 현 야마쿠치현 서남부)에 도착하였을 때 이츠츠히코(伊都都比古)라는 사람이 '나 외에 다른 왕은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필시 왕이 아님을 알고 돌아 나왔지만 길을 잘 몰라 여러 섬과 포구를 헤매다가 북해(北海: 현 동해)를 돌고 이즈모(出雲)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곳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때 천황(스진 천황)의 죽음을 맞게 되어 그대로 머물러 이쿠메(活目, 스이닌(垂仁) 천황을 모시면서 3년이 흘렀다. 천황이 쓰누가아라시토에게 ‘너희나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라고 하자, 그는 매우 바라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아라시토에게 말하기를 ‘네가 길을 헤매지만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대의 천황을 만나 모시었을 것이다. 그러니 미마키(御間城) 천황의 이름을 따서 너희나라 이름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어 아라시토에게 붉은 비단을 주어 본토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그 나라이름을 미마나(彌摩那: 任那)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아라시토는 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나라의 군(郡) 창고에 넣어두었는데, 신라인이 그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일으켜 와 빼앗아 두 나라는 원한을 갖게 되었다.

〇 일설에 의하면, 쓰누가아라시토가 본국에 있을 때, 황소에 농기구를 싣고 가려는데 황소가 없어졌다. 따라 가보니 발자국이 군(郡)의 어느 집으로 나 있었다. 어떤 노인이 이르기를 “그대가 찾는 소는 이미 그 집으로 들어갔다. 군의 책임자 등이 소가 싣고 있는 물건으로 미루어 ‘(이 소를) 필시 잡아 먹으려는 것이니 만약 주인이 찾으러 오면 물건으로 배상해 주기로 하자’하고는 즉시 소를 잡아먹었다. 그러니 만약 소값을 요구받으면 재물을 바라지 말고 군(郡)의 제신(祭神)을 요구하라”고 했다. 잠시 후 군의 책임자가 소값을 물어오자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답하였다. 군의 제신은 흰 돌(白石)이었는데, 이를 받아 집으로 와서 침대에 두었더니 아름다운 어린 소녀로 변하였다. 아라시토가 크게 기뻐하며 동침하려 했는데 아라시토가 다른 곳에 가 있는 사이에 갑자기 사라졌다. 아라시토가 처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자 동쪽을 향해 갔다고 답하였다. 곧 뒤를 쫓아 멀리 바다를 건너 일본국으로 들어갔다. 그가 찾던 어린 소녀는 난파(難波)에 와서 히메코소신사(比賣語曾神社)의 신이 되었다. 또 풍국(豊國) 국전군(國前郡)에 도착하여 다시 히메코소신사(比賣語曾神社)의 신이 되었다.(축역)

상기 기록중 특히 두 번째 ‘일설’을 보면 천일창·적옥녀 전승과 너무 흡사하여 양 전승이 어느 시점에서 상호 습합되었을 것임을 알게 한다.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천일창·적옥녀 및 아라사등·백석녀 전승을 동일 전승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조금만 더 면밀히 살펴보면 아라사등의 도래 시기, 도래 루트, 신분, 출신국 등이 천일창과 같지 않다.

먼저 아라사등의 도래 시기는 스진천왕 65년, 도래 루트는 ‘의부가라→아나토(穴門, 현 야마구치현 서남부)→北海(현 동해)→이즈모(出雲, 현 시마네현)→고시노쿠니(越國) 게히우라(氣比浦)’로 천일창 전승과 상이하다. 

다음은 신분이다.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라는 호칭에서 대체로 ‘쓰누가(都怒我)’는 ‘角形의 관모를 쓴 모습’, 또는 신라·가야 등 한국 고대 국가의 고위 관등인 ‘角干’의 의미로 풀이되었다. ‘아라시토(阿羅斯等)’중의 ‘아라(阿羅)’는 ‘于斯岐阿利叱智干岐’ 속의 ‘阿利’와 함께 신라의 ‘알지(閼智), 알천(閼川)’ 등에 나타난 ‘알(閼)’이라든가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백제 ‘아리수(阿利水)’의 ‘아리(阿利)’와 상통하는 바, ‘大, 貴’의 의미로 풀이되었다. 또한 ‘시토斯等’은 ‘시치叱智’의 다른 표현으로 한국 고대의 통치자 ‘거수渠帥’의 호칭인 ‘신지臣智’로 풀이되었다. 곧 ‘아라사등’의 음가인 ‘아라시토, 아라시치, 아라치, 오로치’는 ‘대거수’ 혹은 ‘대신지’라는 범칭이자 보통명사인 것이다.

이렇게 아라사등이 임나가야의 ‘각간 대신지’라는 높은 관등을 지닌 관인 신분으로서 야마토 스진·스이닌왕조와의 외교를 전담한 인물이라고 할 때 다지마국의 왕으로 정착하였을 뿐아니라 후대 일본 천황가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들어간 천일창 왕자의 신분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천일창을 모시고 있는 게히신궁의 사기(社記)에서는 아라시토가 쓰누가에 도착하자 천황이 게히신궁의 제례를 맡겼는데, 그가 정무를 본 장소가 곧 지금 게히신궁옆의 작은 신사인 쓰누가(角鹿)신사라고 하였다. 또한 그의 후손들은 이 일대의 토호가 되었고, 현재 ‘쓰누가(敦賀)’라는 시의 이름도 그의 가문에서 나왔다고 한다. 현재 쓰누가시 역전 광장에는 소뿔 투구를 쓴 쓰누가아라시토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다음은 출신국이다. 신분 문제도 그렇지만 아라사등 전승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은 그의 출신국인 의부가야(임나가야)에 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측 기록에는 의부가야라는 명칭보다는 임나가야라는 명칭이 더욱 잦게 등장하는데, 임나가야는 과연 어느 곳을 가리키는가?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일본 고대의 저명한 씨성으로 널리 알려진 ‘오호(意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고대의 저명 씨족인 ‘오오(大, 多, 太, 意富, 飫富, 於保)’는 진무천황의 첫째 아들인 카무야이미미(神八井耳命)의 후예로 이야기된다. 진무천황은 동정(東征)에서 성공한 이후 카무야이미미에게 큐슈 북부를 영지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고사기』에는 이러한 카무야이미미를 시조로 하는 씨족으로 ‘意富臣, 小子部連, 坂合部連, 火君, 大分君, 阿蘇君, 筑紫三家連, 雀部臣, 雀部造, 小長谷造, 都祁直, 伊余國造, 科野國造, 道奧石城國造, 常道仲國造, 長狹國造, 伊勢船木直, 尾張丹波臣, 嶋田臣’ 등을 든다. 카무야이미미의 영지가 큐슈 북부였기에 그를 시조로 하는 많은 씨족들이 큐슈 일대를 본향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의부씨 역시 그러하다.
여기에서 ‘의부(스이닌천황 이후 임나로 개칭)’라는 곳이 큐슈 일원일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되는데, 이곳이 다름아닌 큐슈 대마도라고 정확한 위치를 지적하는 한국측의 기록으로『태백일사(太白逸史)』가 있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은 바다로 막혀 있다.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이라 했다. 동서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의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九州, 큐슈)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대대로 살던 땅이 아니다.

이렇듯 대마도가 곧 의부(임나)임을 알게 되는데, 이는 『일본서기』 스진천황 65년조에 나타난 바 ‘임나는 북쪽으로 깊고 험한 바다로 막혀있다’는 기록과도 통한다. 정리하자면, 대마도는 원래 의부가야국이었는데 스이닌천황대에 이르러스이닌천황, 아라사등에 의해 임나가야국으로 불리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야마토 조정은 애초 기나이 일대의 여러 소국중 하나에서 출발하여 서서히 일본 전역을 통일해갔는데 그 최초의 정복왕은 스진천황으로 이야기된다. 대마도·큐슈지역은 야마토조정에 끝까지 반발, 가장 늦게 야마토조정에 통합된 지역의 하나였지만, 적어도 스진·스이닌천황대에는 의부가야의 관인인 아리사등이 야마토조정을 방문하고 야마토조정의 제의를 받아들여 나라이름을 임나로 바꾸는 등 야마토조정에 종속적 관계를 보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아라사등·백석녀 전승을 살피는 과정에서 임나가야라는 나라가 애초 대마도에서 출발되었고, 그 배후에 스진·스이닌 천황이나 천일창 왕자와 같은 인물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진·스이닌 천황대 야마토조정은 천일창 왕자와 같은 한반도의 유력한 도래세력을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또 대마도의 아라사등과 같은 인물과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야마토조정의 세력을 점점 확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스진·스이닌대 야마토조정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 속에서 천일창이나 아라사등과 같은 인물들이 도래하였고 그 과정에서 천일창·적옥녀 전승, 또 아라사등·백석녀 전승과 같은 연오랑·세오녀계 전승이 생겨나게 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는 스사노오 전승, 연오랑·세오녀 전승, 천일창·적옥녀 전승, 아라사등·백석녀 전승 등 수많은 한반도 도래인들에 대한 전승들이 나타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져 오고 있다.  엄밀한 비교 분석을 통해 이들 전승의 관계를 밝힐 수 있겠지만 실상 이들 도래인들이 한결같이 한반도의 선도 제천문화·금속기문화·수도작문화·직조문화·도기문화 등 각종 선진문명을 일본사회로 전파하여 일본 열도가 통일국가로 서서히 도약해 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는 의미에서는 동일 계통의 전승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근대 이후 세계화에 성공하여 빠르게 선진국가로 도약한 일본은 부강한 국력을 배경으로 황국주의적 역사인식을 강화시켜갔고, 이러한 국수주의적 역사인식의 그림자는 고스란히 한국사 분야로 넘어오게 되었다.  황국사관은 한국사 분야에서는 식민사관으로 기능하였고 일제 치하의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의 뇌리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과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패권주의적 역사인식의 전형인 황국사관이 갖는 패쇄성과 국수성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역사인식으로 나아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일본학계에게 고대 한·일 관계에 나타나는 소통과 교류의 역사는 언제나 강조해도 좋은 소재임에 틀림이 없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