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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창의 수도작 보급과 ‘신라농신’으로의 좌정[국학 학술 기획]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세오녀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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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9  10:30:48
정경희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교수  |  k-spirit@naver.com

 

   
▲ 정경희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교수

앞서 천일창·적옥녀 전승을 살펴 보았는데 천일창의 주된 활동지였던 기나이(畿內) 일대, 또 호쿠리쿠(北陸道) 및 산인(山陰道) 일대에는 천일창왕자 관련 수많은 전승이 남아 있다. 이는 과거 천일창이 일본사회에 미친 영향력 정도를 알게 한다.
『일본서기』 이하 일본의 여러 문헌기록에 나타난 바, 천일창이 한반도에서 가져온 선진 문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반도계 도래세력이 일본 열도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일차적 조건이 되는 수준높은 제철문화, 둘째 천일창이 가져온 7~8종의 신보중의 구마노히모로기(제천시에 사용하는 신주)나 3종신기(거울·옥·검으로 제천에 사용된 신물)에서 알 수 있는 제천문화(선도문화), 셋째 천일창의 도래지에 널리 남아 있는 벼농사 보급과 관련한 전승을 통해 알게 되는 수도작문화, 넷째 천일창의 부인 아카루히메가 가져온 직조문화, 다섯째 기나이 일대에 자리잡은 천일창의 세력(종인(從人)이 전파하였다는 스에기(須惠器, 야요이시대 연질토기와 계통을 달리하는 경질토기) 등을 꼽아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천일창에게 부여된 첫 번째 이미지는 한반도 도래세력 일반에게 나타나는 정복자의 이미지이다.  천일창이 도래한 시기는 대체로 3세기말 4세기초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이즈음은 야요이시대에서 막 고분시대로 넘어가던 격동기였다.  3세기 한국측 기록과 중국측 기록에 등장하는 왜여왕 히미코(卑彌呼)시대 30여 개 국으로 나뉘어 쟁투하던 혼란의 시기가 끝나고 스진(崇神)천황이라는 고분시대 최초의 정복군주가 등장하여 기나이 야마토(大和) 조정의 집권화 노력이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당시 야마토의 집권력은 그다지 높지 못한 상황이었다. 스이닌 천황의 선대인 스진천황대에 이르러 비로소 집권화를 위한 정복전쟁의 움직임이 시작된 상황이었기에 각 지역마다 군웅이 할거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래한 천일창 왕자가 정복자적인 요소를 기본으로 하였음은 매우 자연스럽다.  천일창이 도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스이닌천황이 천일창으로 하여금 스스로 지배지를 선택할 권한을 부여했다거나 천일창이 효고현 일대에 도착한 이후 그 지역의 토착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모습에서 천일창이 막강한 무력을 대동하고 자신이 거주할 영지를 찾아 나서는 정복자로서의 면모를 기본으로 하였음을 알게 한다. 


많은 학자는 천일창 세력이 수준높은 제철 기술을 가진 무사·제철장인 집단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며, 천일창의 이동 경로인 하리마, 오우미, 와카사, 타지마 등이 한결같이 고대의 주요 철산지임을 지적한다.  특히 천일창왕자의 최종 정착지인 다지마국은 금·은·동광이 풍부한 철산지이다. 또한 이 지역에는 무기 제작과 관련된 신라신인 스사노오, 오쿠니누시(大國主神), 천일창 등 병신(兵神, 兵主神)을 모시는 효즈(兵主) 신사가 가는 곳마다 있어 한 때 제철집단의 중심지였음을 알게 한다. 『연희식(延喜式)』신명장(神名帳)에는 19개소의 효즈신사가 등장하는데, 다지마국에 있는 7개 신사가 중심이 되고 있고 오우미 지역에도 천일창을 모시는 효즈신사가 여럿 있다.  효즈신사와 천일창의 관계는 천일창의 도래와 영지 개척이 제철문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천일창 세력은 이러한 제철문화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 자신이 거할 영지를 스스로 개척하였다. 실제로 그의 세력권이었던 기나이 일대나 호쿠리쿠·산인 지역의 향토 기록이나 민간 전승에 남은 천일창의 모습은 무사의 이미지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수도작 보급과 관련한 치수(治水)·치산(治産)에 관련한 이미지가 많다. 그가 정복자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실제적인 기록에 보여주는 이미지는 정복자의 이미지보다는 물길을 내어 치수하고 농지를 개척, 벼농사를 보급함으로써 대중을 가난과 빈곤에서 구제하는 이미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야요이 초기의 도래인인 스사노오 역시 나무를 심어 배를 만들고 건물을 짓는 등 백성을 널리 보살피는 행적을 보였지만 신비롭고 주술적인 힘을 가진 신적인 이미지로 묘사된 것과 달리 야요이 말기·고분시대 초기의 도래인인 천일창은 현실속의 인간으로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시대변화에 따른 표현법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나라·교토 등 기나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농업 개척신으로서의 면모이다. 비와호 북쪽에 주변둘레 6㎞의 작은 호수인 요고(余吳) 호수가 있다. 여기에는 천일창이 산을 깎아서 요고호의 물을 막고 호수를 좁혀서 논밭을 개척했다고 하는 전설이 남아 있다.  이 일대에는 천일창을 모시는 신사들이 적지 않다.
기나이 지방도 그렇지만 천일창왕자의 최종 정착지이자 본거지인 산인이나 호쿠리쿠 일대에서도 천일창의 주된 이미지는 역시나 농업신이다.  먼저 그의 마지막 정착지인 다지마국 일대는 원래 바닷물과 호수로 진창이 된 곳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곳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으로 개발한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천일창이다. 그는 부근 마루야마가와(圓山川) 하구의 세토(瀨戶), 스이야마(津居山) 사이에 있는 바위산을 개척해 물줄기를 동해 쪽으로 흘려 보내는 등 신통력을 발휘해 다지마 평야를 비옥한 경지로 만들었다고 하며, 지역민들 사이에서 마루야마가와의 치수와 식량 증산에 공적을 남긴 신으로서 높은 추앙을 받는다.  이러한 공로로 인해 다지마국의 이치노미야(一宮)인 이즈시(出石)신사에 천일창이 제신이 되어 모셔지고 있다.

  현재 이즈시신사 경내에는 신라왕자 천일창의 치수 및 치산 공적을 자세하게 적은 한글 안내판까지 마련되어 있다. 


다음은 쓰루가 일대이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신사는 과거 에치첸국(越前國)의 이치노미야(一宮)였던 게히(氣比)신궁이다. 이 신궁의 주신인 이사사와케대신(伊奢沙別大神)은 다름 아닌 천일창의 별칭인데, 게히신궁의 사기(社記)에서는 천일창에 대한 다양한 이칭으로 이사사와케대신, 게히대신(氣比大神, 食靈大神), 미케쓰노오카미(御食津大神)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천일창의 주된 이미지는 병신(兵神)이나 군신(軍神)이 아닌 농신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천일창이 농업신으로 숭상되었던 점과 관련하여 일본신도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농신인 우카노미타마카미(宇迦之御魂大神)나 사루다히코(猿田彦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재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신사중 하나로 전국적으로 3만 2천의 속사를 가진 후시미이나리대사(伏見稻荷大社)가 있다. 이 신사는 711년 천일창과 같은 계열의 도래세력인 하타씨(秦氏)의 거두, 하타노이로코(秦伊呂巨)가 창건하였는데, 농신 우카노미타마카미(宇迦之御魂大神)를 주신으로 하여 역시 농신인 사루다히코(猿田彦命)를 모시고 있는 바 일본신도 전통에서 가장 대표적인 농신 사당이다. 

 

주신인 우카노미타마카미는『일본서기』·『고사기』에 공히 나타난다. 『고사기』에서는 스사노오와 카무오오이치히메(神大市比賣) 사이에서 오오도시카미(大年神)와 우카노미타마카미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한『일본서기』에서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신이 많은 섬들과 신들을 낳은 후 허기지고 기력이 없을 때  우카노미타마카미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우카노미타마카미는 한반도계 도래신이자 원조격 농신으로 일체의 곡식과 풍요를 관장하는 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농신중에서도 가장 원조격의 농신으로서 우카노미타마신의 높은 위상에 대해서는 이세신궁 외궁(外宮)에 우카노미타마가 도요케대신(豊受大神)의 이름으로 모셔지고 있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다음 사루다히코(猿田彦命)는『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천신으로 니니기의 천손강림시에 길을 안내하였다는 신으로 농업을 관장하는 신이다. 사루다(猿田)는 ‘논’을 가리키는 조선어 ‘쌀밭’에서 유래하여 일인들이 한국어의 된발음이 서툴러서 ‘쌀’을 ‘사루’라고 발음한 데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한다.  사루다히코의 부인 또한 사루메노키미(猿女君)로 역시 농업과 관련된 신이다.  게히신궁이나 후미시미이나리대사에서는 이 유명한 농신 사루다히코가 공히 모셔지고 있다. 


이처럼 우카노미타마카미나 사루다히코는 신라농신 천일창 이전부터 존재해오던 한반도의 원조 농신으로서 야요이시대 이래 한반도로부터 벼농사가 지속적으로 전파·보급되었던 실상을 알게 한다.  천일창이 도래한 후 수많은 지역을 개간하고 벼농사를 널리 보급하는 과정에서 우카노미타마나 사루다히코를 모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자신도 농신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시라기노이나이노미코토(新良貴稻飯命)’ 곧 신라농신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이 숭앙해오고 있는 원조격 농신이 있었음에도 천일창이 게히대신(食靈大神), 미케쓰노오카미(御食津大神)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농신으로 자리매김된 점이 흥미롭다.  이에는 분명 그에 걸맞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야요이시대 말기이면 벼농사를 손쉽게 지을 수 있는 곳에는 이미  벼농사 보급이 끝났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일창의 벼농사 보급이란 단순한 벼농사의 보급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업이었을 치수·개간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여 벼농사를 확대하는 개척사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천일창은 이처럼 힘든 사업을 이뤄낸 공로로 인해 원조 농신과 다른 새로운 차원의 농신, 곧 농업 개척신의 지위에 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하였으므로 그의 농신으로서의 권위는 대단히 높아 교토 후시미이나리대사의 우카노미타마, 또 미에 이세신궁 외궁의 도요케대신이 애초 천일창, 곧 미케쓰노오카미(御食津大神)이었다가 후대에 우카노미타마나 도요케대신으로 변개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천일창의 수전 개척자로서의 면모, 또 신라농신으로 좌정한 면모는 그가 일본 고대사나 일본신도 전통에서 높은 위상을 갖게 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천일창은 강력한 힘을 지닌 정복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수전 개척과 벼농사 보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일본사회를 풍요롭게 한 실질적인 공적으로 오래 오래 잊혀지지 않고 추앙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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