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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사노오가 이끄는 무사·제철세력의 수호신 문제[국학 학술 기획]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세오녀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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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7  17:06:14
정경희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교수  |  k-spirit@naver.com

  

   
▲ 정경희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

앞서 스사노오가 무사·제철세력을 이끈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사상·종교적으로는 한국 선도문화 일반의 지도자상, 곧 군왕인 동시에 최고의 선인(仙人)을 의미하는 ‘스승왕(師王)’의 역할을 표방하였고 실제로도 이러한 이름에 걸맞게 공익적 실천의 삶을 지향하였음을 살펴 보았다.

 이제 이러한 스사노오가 이즈모 일대에 뿌린 선도 제천문화을 살펴보자.  고진다니나 가무이와쿠라 유적에서 나온 동검·동탁 등 청동제기를 이용한 제천의례의 실체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스사노오가 스승왕으로서 선도 제천을 집전하였다고 한다면, 그가 모신 제천의 신격은  어떠하였을까?  선도 제천을 집전하였으니 그 신격은 당연히 ‘일기(一氣)·삼기(三氣), 또는 그 인격적 표현으로서의 하느님·삼신’이었을 것인데, 일본측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모신 신, 또는 그 스사노오 자신이 ‘우두천왕’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이 "656년 또는 666년 고구려 사신 이리시노오미가 신라 우두주(牛頭州) 우두산(牛頭山) 제천단의 제신으로 모신 우두천왕의 신주를 교토로 가져와서 안치하였는데 이것이 기온사(祇園寺), 곧 후대의 야사카(八坂)신사였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야사카신사의 제신은 ‘고즈텐노(牛頭天王)=스사노오’로 양자가 동일시되어왔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흥미로운 건 기온사가 불교의 우두천왕을 모신 절이라는 점이다. 곧 불교 전승에 의하면 ‘기원(祇園)’은 인도 사위국(舍衛國) 태자가 부처에게 공양한 나무를 의미한다. 곧 사위국의 수달(須達)이라는 자가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세웠는데 그 수호신이 우두천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불교 전승에 따라 야사카신사의 유래를 인도 혹은 중국불교와 연결하여 불교적인 우두천왕 신앙과 스사노오 신앙이 습합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이즈모 지역에서 행한 제천의 신격을 정리하고자 하면,  하느님·삼신, 스사노오, 우두천왕, 여기에다 불교의 우두천왕까지 뒤엉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러한 엉킴은 한국 상고·고대의 제천문화를 출발점으로 하여 한갈래 한갈래씩 풀어나갈 때 비로소 풀어지게 된다. 

 한국의 선도 제천문화는 배달국시대 환웅천왕에서 비롯되었다. 배달국 제천문화의 원형은 요서지역 대릉하 일대의 동산취 유적이나 우하량 유적 등 홍산문화 후기(B.C. 3500 ~ B.C. 3000)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보이는 여러 제천 유적에 잘 나타나 있다.  배달국의 천왕들은 제천의 집전자이면서 통치자, 곧 선도문화의 스승격 존재로서 사왕(師王)으로 개념화되는 존재들이었다. 

 배달국의 역대 천왕들 중에서 배달국 말기의 가장 저명한 천왕은 다름아닌 14대 천왕인 치우(蚩尤) 천왕이다.  이즈음 중원 지역에서 황제(黃帝)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배달국이 중심이 되는 오랜 선도문화의 천자-제후 질서를 와해시키자 치우는 중원지역 경략을 통해 선도문화권을 안정시킨 바 있다.  중원지역의 혼란을 평정한 강한 무력과 통치력으로 인해 그는 길이 길이 전쟁의 신, 승리의 신으로 숭상되었고 그에 대한 신앙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갔다.  치우천왕은 주로 소머리 투구를 쓴 형상으로 표현되어 우두천왕으로도 불렸고 군사집단에서 특히 숭상되는 신격이었다. 

 

 치우천왕(우두천왕) 신앙은 티벳·인도지역으로도 흘러 들어가 힌두문화 속에 녹아 들어가 있다가 다시 불교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붓다를 호위하는 호법 천신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것이 불교식의 우두천왕이고 불경에 등장하는 기원정사였다.  불교식의 우두천왕-기원정사 신앙은 불교의 동전(東傳) 과정에서 재차 중국·한국·일본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한국에 불교식의 우두천왕-기원정사 신앙이 전해져 왕실에 의해 수용되었음은 신라 566년(진흥왕 27) 진흥왕이 경주에 기원사(祇園寺)를 세웠던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불교식의 우두천왕-기원정사 신앙은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까지 전파되었으니 앞서 언급한 바 7세기 고구려사신 이리시노오미가 신라 우두주에서 우두천왕의 신주를 모셔와 기온사(祇園寺)를 세운 것은 이러한 전파 경로를 거친 것이었다.


스사노오의 시대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니 이때의 우두천왕은 불교와 습합되기 이전의 치우천왕이었다.  스사노오는 무사·제철 집단을 이끄는 무사적 면모가 강한 ‘사왕(師王)’이었기에 제천을 하면서도 특히 치우천왕을 매개로 제천을 하는 면모를 보였다. 

 

선도 제천의 대상이란 궁극적으로 ‘일기·삼기’로 표현되는 바 생명 자체으로서의 하늘이며, 이를 인격화하여 표현하면 ‘삼신·하느님 또는 마고·삼신’일 뿐이지만 실제적인 제천의 과정에서는 역사적 인물로서 제천문화를 사람들에게 알려준 사왕으로서의 삼성(환인·환웅·단군)을 매개로 하여 제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국시대에는 동명왕이나 박혁거세왕과 같은 시조신을 매개로 하여 제천하였다. 

 

스사노오가 우두천왕(치우천왕)을 모신 것도 우두천왕을 매개로 제천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러할 때 스사노오는 실제 제천의 집전자이지만 마치 우두천왕(치우천왕)을 모신 존재로 비추어지게 되며 때로는 우두천왕과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특히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는 불교적인 우두천왕의 이미지까지 더해지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스사노오는 제천의 집전자보다는 우두천왕(치우천왕) 신앙자, 또는 우두천왕 자체로 인식되었고 그것이 현재에 남은 스사노오의 이미지이다.


고대 한국의 군사집단에서는 특히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우두천왕을 모셨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소뿔형 투구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으로 건너간 무사세력도 그러하여, 가령 스진·스이닌천왕의 시기 의부가야(임나가야) 왕자였다는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의 경우 ‘이마에 뿔난 자’라고 하여 소뿔 투구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뿔형 투구는 일본으로도 전해서 일본 무사들의 투구 형식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게 스사노오가 선도제천의 신격으로 치우천왕을 매개로 하였음은 그와 그의 후예들이 ‘용사신(龍蛇神)’으로 인식되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의 여러 기록에서는 야사카신사의 제신인 스사노오=우두천왕은 원래 용사신이었다고 하였다. 실제로도 이즈모 일대에서는 스사노오=스사노오의 후손=용사신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고 다른 지역으로도 널리 퍼져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라 미와산 아래 오미와신사의 제신인 오쿠니누시(대국주신)이 뱀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용사신 신앙의 원류는 배달국의 개창주이자 선도제천을 보급한 전설적인 스승왕 환웅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배달국 문화의 시금석인 홍산문화에서는 용(龍) 형태 및 봉(鳳) 형태의 옥기류가 다수 만들어졌다.  대체로 용과 봉은 세트를 이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용은 땅, 봉은 하늘을 상징하면서 하늘과 땅이 하나임을 표현한 것이었다. 용과 봉은 꼭같이 ‘일기·삼기’의 생명을 의미하지만 땅에 있느냐 하늘에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배달국시기 역대의 환웅들은 대체로 용사(龍蛇)의 형태나 웅(熊)의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당시의 선도문화가 신비한 종교문화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속에서의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실천을 중시하는 생활문화로서의 측면이 강하였던 점과 같은 맥락이다. 용사나 웅으로 표현된 환웅은 뇌신(雷神, 천둥번개신)으로 불리었고 북두칠성 수레를 탄 모습으로도 표현되었다. 14대 환웅이었던 치우천왕 또한 용사나 웅으로 널리 표현되었다. 

 

배달국시대 환웅에 관한 상징적 표현법으로서 시작된 용사나 웅의 표상은 후대로 이어져 역대왕조의 시조신이나 영웅신들이 용사, 또는 웅으로 묘사되었고 뇌신으로도 불렸다.  용사나 웅으로 표현되곤 했던 치우천왕(우두천왕)을 모시는 스사노오가 용사나 웅으로 표현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같은 신앙 체계를 지녔던 그의 후손들 또한 자연스럽게 용사나 웅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스사노오가 용사로 표현됨과 동시에 웅으로도 표현되었음은 스사노오를 제신으로 모시는 이즈모 미쓰에(松江) 지역 구마노대사(熊野大社)의 주신이 ‘가부로기쿠마노오오카미쿠시미케누노미코토(神祖熊野大神櫛御氣野命)’이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일본 고대사에 등장하는 ‘웅(熊)’의 음가는 ‘가미, 고마, 가무’로 ‘神, 天’이라는 의미였다.


이즈모 지역에서 가장 큰 신사는 스사노오의 후손인 오쿠니누시(대국주신)을 모신 이즈모대사이지만, 이즈모대사보다 격이 한단계 더 높은 신사는  스사노오를 모신 구마노대사이다. 구마노대사는 과거 이즈모국(出雲國)의 이치노미야(一宮)로서 반드시 구마노대사의 제향을 한 다음 순서로서 이즈모대사의 제향을 진행했다고 한다.  구마노신사는 기이(紀伊, 현 와카야마和歌山) 지역의 구마노산잔(熊野三山: 熊野本宮大社·熊野速玉大社·熊野那智大社)이 유명하지만 이들은 이즈모의 구마노대사에서 권청(勸請)해 나갔던 데 불과하니 이즈모의 구마노대사가 원형이다.

 

이처럼 영웅을 용사나 웅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비단 스사노오에 한한 것은 아니다.  한반도 도래인들이 모두 동일한 선도문화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씨신(氏神)을 용사나 웅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상에서 스사노오가 한 선도 제천문화가 치우천왕(우두천왕)을 매개로 한 방식이었고 그 결과 후대에 스사노오가 치우천왕(우두천왕)과 동일시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음을 살펴 보았다.  야요이 시대 한반도 도래인의 출신 성분이 무장세력이었던 경우가 많았기에 도래세력 내에서 치우천왕을 모시는 예가 매우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도래한 이후에도 수많은 소국들이 싸워 야마토왕권을 이뤄내는 집권화의 과정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고 이러한 가운데 치우천왕=스사노오에 대한 신앙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야마토왕권이 안정된 이후 덴지(天智)천황대에 이세신궁의 위상이 높아지고 아마테라스의 국조신으로서의 위상이 강조되는 바 종교정책의 일대 전환이 있었다. 이는 야마토정권이 비교적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마테라스의 위격 아래로 치우천왕=스사노오가 편제되기는 했지만 치우천왕=스사노오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숭앙을 받았다.  한반도 도래세력간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되어 일본사의 주요 특징으로 자리잡은 무사문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신, 승리의 신은 현실적으로 더욱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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