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가(戀歌)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비바람이 치던 바~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아시지요?”

5월 30일 아침 하루루세계시민연수원을 출발하는 버스에서 조해리 명상트레이너는 물었다. 이곳저곳에서 대답했다. “알아요”. “압니다.”

“그 노래 원곡이 어느 나라 노래인지도 아나요?”

누군가 조용히 “뉴질랜드요.”라고 말했다.

“맞아요. 이 연가는 뉴질랜드 마오리의 유명한 민요입니다. 연가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해요. 원곡을 들어보세요.”

마오리 어로 듣는 연가, 우리의 연가보다 더 차분한 듯하고 선율이 아름다웠다. 이날부터 버스에서는 마오리 연가가 울려 퍼졌다.

 

연가는 뉴질랜드 마오리의 전통 민요인 ‘포카레카레아나(Pokarekare Ana)를 우리말로 개작한 것이다. 이 민요는 뉴질랜드 북섬에 있는 로토루아라는 지역의 아름다운 여인 히네모아(Hinemoa)와 로토루아 호수 중간에 있는 모코이아 섬에 사는 청년 투타네카이(Tutanekai) 사이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노래이다. 위대한 족장의 딸인 히네모아는 부족의 반대와 위험을 무릅쓰고 헤엄쳐 섬으로 가서 투타네카이와 사랑을 이룬다.

▲ 가축은 개밖에 없었던 뉴질랜드에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 목축의 나라로 바뀌었다. <사진=정유철 기자>

 

‘포카레카레아나’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에 참전한 마오리 병사들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뉴질랜드가 1949년에 한국을 승인한 이후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며, 1962년 한국과 정식 수교를 맺었다. 뉴질랜드가 공식 발표한 한국전쟁에 관련 참전 자료에 따르면 참전 기간은 1950년 7월 30일~1953년 7월 27일이며, 참전 규모는 포병 1개 대대, 군함 2척을 포함하여 연인원 6020명이었다. 이 가운데 45명이 사망하여 부산 국제연합기념공원에 34기가 안치되어 있다. 참전기념 시설물로는 영국연방 4개국(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 캐나다) 합동 참전기념비(경기도 가평), 뉴질랜드 참전기념비(부산 국제연합기념공원), 가평전투기념비(경기도 가평)가 있다.

 

 이런 자료를 상기하며 버스에서 케리케리 들판을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농촌에서 볼 수 있는 논이나 밭은 전혀 볼 수 없고 온통 초지와 산지다. 초지에는 소떼와 양떼가 한가하게 풀을 뜯는다. 목축의 나라, 뉴질랜드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보기 힘든 것도 뉴질랜드 농촌의 특색이다. 이런 뉴질랜드 농촌의 모습은 유럽인들이 바꿔놓은 것이다.

 

“밖을 보면 소떼, 양떼들이 보이지요. 뉴질랜드에는 가축이 없었다고 해요. 저 소, 양은 유럽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조해리 명상트레이너는 버스 안에서 뉴질랜드에 관한 토막상식으로 우리를 즐겁게 했다.

뉴질랜드 자연은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크게 변모하였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 약45,000년 전의 소위 ‘기후변화’에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았던 뉴질랜드의 대형동물군은 인류가 그것에 발을 들이자마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뉴질랜드의 첫 사피엔스 정착자인 마오리족이 그 섬에 도달한 것은 약 8백 년 전이었다. 그로부터 2백 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곳의 대형동물 대부분이 멸종했고 모든 조류 종의 60퍼센트도 멸종했다”고 설명한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폴리네시아인들은 수세기 동안 단백질이 풍부한 바다표범과 모아(moa)라는 거대한 무익조류(無翼鳥類)를 잡아먹으며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날 수 없었던 모아는 멸종되고 바다표범의 수는 격감하자 이들은 원시농경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뉴질랜드에는 개 외에는 가축이 없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뉴질랜드에 들어오면서 뉴질랜드의 환경은 격변한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스, 2003)에서 유럽인들이 바꾼 뉴질랜드 풍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1840년 즈음에는 2천 명의 백인 이주민들이 10만 명의 마오리족과 섬을 공유하고 있었다. 1854년에는 백인들이 3만 2천 명으로 증가하고 마오리족은 약 6만 명으로 줄어든 이후 마오리 인구는 백 년 동안 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반면 유럽인은 계속 증가하였다. 변화의 원인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비슷하였다. 폴리네시아의 농경민족인 마오리족에게는 작은 개 말고는 가죽이 없었다. 실제로 뉴질랜드에는 아주 오래 전에 날아든 박쥐 한 종류, 마오리족과 함께 들어온 개와 쥐 이외에는 토종 포유동물이 없었다. 마오리족은 군집 생활의 질병에 노출된 적도 없었다. 그들은 유럽에서 들어온 전염병에 곧 쓰러졌다.

뉴질랜드도 역시 유럽 생물군의 확산을 경험했다. 유럽의 잡초들은 사람들보다 먼저 외진 오지까지 퍼져 나갔다. 유럽의 작물들과 동물들도 뉴질랜드 경관의 일부가 되었다. 마오리족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1840년에 타마티 와카 네네(Tamati, Waaka Nene)는 이렇게 물었다. “땅은 이미 사라진 것 아닌가? 인간들, 이방인들, 외국인들로 온통 뒤덮여서 풀과 목초까지도 낯선 것들도 가득 차서 우리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영국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정직성을 너무 과대평가했음을 깨닫게 되자 19세기 후반부터는 맹렬하고 조직적인 군사적 저항에 나섰다.

결국 그들은 뉴질랜드가 유럽식 경관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을 돌이키지 못했다. 1981년에 뉴질랜드는 270만 명의 백인과 7천만 마리의 양, 8백만 마리의 소, 32만6천 톤의 밀을 생산하는 들판으로 가득 찼다. 이것들은 모두 유럽의 종자였고, 유럽의 언어를 쓰는 인구에 의해 통제되었다.”

 

연가의 나라, 목축의 나라 뉴질랜드에서 지배와 피지배로 얼룩진 역사가 남긴 것들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