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8세기에서 13세기 후반이다. 동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카누를 타고 뉴질랜드에 이주하였다. 이들의 이주를 두고 “사람이 없는 땅이 땅이 없는 사람을 기다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은 뉴질랜드의 원주민으로서 마오리어로 탕가타 훼누아(Tangata whenua: 땅의 주인)라 불렀다. 이들의 신체특징은 눈과 머리가 검고, 피부는 약간 검다. 조상이 같은 혈족(출신집단)간에 일정한 토지를 공유하고, 협력에 의해 생업을 영위하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은 세계를 창조한 신과 조상의 영혼이었다. 마라에(marae)라고 하는 집회장을 대대로 지켜왔다. 마라에는 조상의 영혼이 깃든 신성한 장소로 해석되어 의례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 사회는 출신집단에 관한 귀속의식, 조상과의 연결, 마라에와의 긴밀한 관계가 특히 중시된다.

마오리와 파케하 접촉

뉴질랜드가 유럽인에게 이주의 대상이 된 것은 1769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두 번째 탐험을 하면서부터다. 그에 앞서 1642년 네덜란드인 아벌 얀손 타스만(Abel Janszoon Tasman, 1603~1659)이 뉴질랜드를 처음 탐험하고, 이곳을 ‘노바젤란디아’라고 명명하였다. 뉴질랜드는 그가 지은 이름을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럽인들은 뉴질랜드 원주민 땅카타 훼누아를 '마오리'라고 불렀다. 마오리는 '평범한, 보통'이라는 뜻이다. 마오리인들은 뉴질랜드에 온 유럽인을 '파케하(pakeha)'라고 불렀다. '얼굴이 흰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쿡 선장의 탐험 이후 프랑스도 관심을 보였으나 교역 등에서 마오리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던 영국이 1840년에 와이탕이조약을 체결하고 영국 식민지로 하여 소유권을 선언하게 되었다. 마오리가 해석한 조약의 내용은 영국과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인권, 문화, 토지 그 외 자산 등은 영국 여왕의 보호하에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자비한 토지의 수탈과 동화정책이고, 남해 고도의 정적은 깨졌다.

▲ 와이탕이조약 체결지에 전시된 마오리의 카누. 76명이 탈 수 있는 전선이다.

조약을 계기로 유럽인들이 계속 증가하여, 목축이나 농경을 위한 토지를 확보할 목적으로 마오리의 토지를 불법으로 손에 넣으려는 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마오리는 이를 막기 위해 부족을 초월하여 마오리왕을 옹립하고, 파케하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으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진압되어 토지와 함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더욱이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전염병에 의해서도 많은 마오리가 목숨을 잃었다.

파케하 선교사는 이주 당시부터 비문명 상태에 있는 이교도로 비친 마오리를 기독교로 개종을 꾀했다. 마오리가 신앙의 대상에 제사를 올리는 전통적인 장소에는 교회 등 그리스트교 관련 시설을 세우고, 마우리의 개종을 요구했다. 종교 동화정책은 마오리에 서양의 가치관에의 동화도 촉진하여, 마오리 고유의 가치관이나 관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마오리의 대부분이 그리스도교도이다(마오리는 전통적인 종교관까지 버린 것은 아니다. 마오리종교는 그리스도교와 습합한 상태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 조약기념관. 판무관 제임스 버스비 가족이 살았던 공관을 기념관으로 만들어 와이탕이조약에 관한 자료를 전시한다.

식민지 정부는 교육정책에서도 마오리의 서양화를 추진하였다. 1867년에는 원주민학교법을 시행하여, 학교에서 마오리어 사용을 금지하고, 영어만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마오리어사용자가 감소하고, 언어의 소멸이 우려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언어 동화만이 아니라 서구의 가치관 이입이라는 점에서도 교육정책은 종교 동화와 함께 파케하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렇게 경제 기반인 토지를 많이 잃고, 언어가 부정되고, 전통 가치관까지도 파케하에 의해 왜곡된 마오리는 집단귀속의식의 상대적인 저하, 전통 사회구조의 변화, 나아가 전통예술이나 의례의 쇠퇴 등 문화나 사회면에서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 체결지를 가다

5월31일 오전 파이히아에 있는 와이탕이(waitangi)조약 체결지를 방문했다. 와이탕이 조약은 영국과 마오리족장들이 체결한 식민지화를 위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와이탕이 조약 체결지에는 와이탕이박물관, 방문자센터, 기념품판매점이 있고 조약기념관(Treaty House), 마오리집회소(meeting house), 카누전시장(canoe house)가 있다. 방문자 센터 겸 기념품점에는 와이탕이 조약게 관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뉴질랜드 역사에서 와이탕이 조약이 지닌 의미를 설명하는 영화를 상영한다. 기념품점에는 뉴질랜드 역사책, 제임스 쿡 선장에 관한 책, 마오리 문화에 관한 책 등을 판다.  나중에 뉴질랜드 역사책과 와이탕이 조약에 관한 책을 3권 구입했다. 기념품 판매점을 지나 카누전시장으로 갔다. 76명이 탈 수 있는 거대한 카누는 길이가 35미터에 달한다.  붉은 선체의 선미에는 사람의 얼굴을 조각되어 있다. 이 카누는 전투용으로 이름이 나토키마타화오루아(Ngatokimatawhaorua)라고 한다. 뉴질랜드를 처음 발견한 폴리네시아인 쿠페(KUPE)가 타고 온 배 이름이 처음에는 마타하오루아(Matawhaorua)였으나 하와이키로 돌아갈 때는 나토기마타화오루아라고 하였다. 이 카누를 전시함으로써 마오리가 폴리네시아에서 뉴질랜드로 이주하였을 때 이용한 것을 재현하고 있다.

▲ 영국과 마오리부족간에 체결된 와이탕이조약체결지에 세운 깃대에는 뉴질랜드 국기와 영국 국기 유니언잭, 구 뉴질랜드 국기가 펄럭인다.

왜 여기에 카누를 전시할까. 이 카누를 전시함으로써 마오리도 옛날에 무인도였던 뉴질랜드에 온 이주자이고, 백인과 마오리는 같은 이주자임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다. 

 이 전선 카누는 1940년 와이탕이조약 체결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안을 제시한 사람이 테 푸에아(Te Puea)라는 마오리 여성이다. 1930년대 와이카토(waikato)부족은 카누제조기술을 되살리는 데 앞장섰다. 와이카토의 지도자 테 푸에아는 1940년 와이탕이조약 조인 100주년 기념으로 와카(WAKA, 카누) 함대를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녀는 북섬 마오리 부족이 각자 카누를 만들도록 하고 와이카토의 조각 기술을 제공했다. 이 일은 1937년 후반에 시작하여 완성하는 데 2년이 걸렸다.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카누전시장 앞 해변은 홉슨비치(Hobson Beach)라 한다. 식민지가 되면서 지명도 빼앗긴다.  1930년대에 이름을 붙였는데, 윌리암 홉슨 대위가 1840년 2월 이 해변으로 와이탕이 상륙을 기념한 것이다. 이곳에 도착한 홉슨은 2월 6일 와이탕이 조약에 처음 서명을 받는다. 윌리엄 홉슨은 뉴질랜드의 초대 총독이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842년 사망한다.

조약지결지에 우뚝 솟은 깃대에는 영국국기가

흡슨비치를 지나 왼쪽으로 가니 넓은 잔디 뜰이 나온다. 멀리 바다 건너에는 뉴질랜드의 최초 수도였던 럿셀이다. 세 개의 국기가 펄럭이는 깃대로 간다. 이 뜰은 영국이 뉴질린드를 식민지화한 중요한 회담이 열린 장소이다. 1934년 3월에 국기를 정하기 위해, 1835년 10월에는 뉴질랜드의 독립선언을 하기 위해, 1840년 2월에는 와이탕이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회담이 열렸다. 뜰의 석판에는 "이곳에서 1840년 2월6일 와이탕이조약이 조인되어 뉴질랜드는 영국제국의 일부가 되었다"라고 새겨놓았다.

와이탕이 조약은 모두 3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① 마오리 부족장은 영국 여왕에게 주권을 이양한다. ② 부족장의 토지와 자원 소유권은 보장한다. 단, 모든 거래의 당사자는 여왕이다.

③ 마오리 부족 모두 영국 시민과 같은 권리와 특혜를 받는다.

영국은 마오리 부족장에게 조약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통역을 맡은 선교사 헨리 윌리암스는 조약 내용이 마오리에게 큰 이익이 된다고 속였다. 그리하여 26개 부족이 서명하고 나중에 500개 부족이 서명하였다. 그러나 조약 내용과는 달리 유럽인의 토지 침탈이 심해지자 마오리 저항운동이 일어나 토지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 와이탕이조약 체결 100주년을 맞아 개관한 마오리식 건축 마우리집회소에서는 마오리 공연이 열린다.

뜰 중앙에 십자가 모양의 마스트에 국기 3개를 게양하였다. 1840년 2월 6일 와이탕이 조약이 조인된 장소를 표시하는 깃대를 1947년 뉴질랜드 해군이 세웠다.  십자 정상에는 1902년 제정된 뉴질랜드 국기,  십자 좌우에는 1834년부터 사용된 뉴질랜드 부족연합회기, 1840년대부터 사용된 영국 국기(유니언잭)이 펄럭인다.  뉴질랜드는 영국인이 지배하는 나라임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깃대를 지나 나무 아래로 가서 서로 코를 대고 인사하는 마오리 인사를 하며 마오리문화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11시에 시작되는 마오리 공연을 보기 위해 마오리집회소로 이동하였다. 마오리집회소는 마오리어로 테 화레 루낭아라고 하는 데 마오리식 건물로 브레디스로(Bledisloe)가 와이탕이의 땅을 뉴질랜드에 기증한 것에 응하여 1932년 마오리가 건립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와이탕이 조약 100주년인 1940년에 개관하였다. 지붕과 기둥은 붉은 색, 벽은 흰색으로 하고 붉은 색 부분은 모두 마오리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고 지붕에는 조상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마오리 방식에 따라야 하나 비가 내려 간단하게 하였다. 안으로 들어가 마오리 공연을 보았다. 조약체결지에 마오리 건물은 어떤 의미일까.

마오리집회소를 나오면 오른쪽으로 조약기념관(Treaty House)가 있다. 이 건물은 1833~34년에 지은 것으로 뉴질랜드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안내 자료에는 1833년부터 1840년까지 공식적인 '영국 통감부'였다고 한다. 영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최초로 뉴질랜드에 파견된 판무관 제임스 버스비(Busby, 1801~1871)가 부인 아그네스와 자녀 6명과 생활한 공관이다.  버스비 사후에 1882년 유족이 건물을 팔아 15년간 방치되었다. 그후 브레디스로 부부가 구입하여 1932년 정부에 기증하여 기념관으로 개조하였다. 안에는 와이탕이조약체결지가 국가의 기념관이 되기까지의 경위, 와이탕이조약의 체결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전시한다. 마오리의 역사를 아는 마오리가 이 기념관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기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어 유배된 마오리. 민족과 국가를 넘어 인류가 모두 행복하게 사는 길은 없는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이 얼마나 큰 사상인가 새삼 느낀다. 인류가 모두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면 지구촌이 낙원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