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경(金允經, 1894-1969) 호는 한결이다. 경기도 광주군 출신이다. 1911년 상동교회의 청년학원에 입학했으며, 주시경에게 배웠다. 졸업한 뒤에 경남 마산에 있는 창신학교에 부임하여 국어·역사·수학을 가르쳤다. 여기서 이윤재를 만났다. 마산창신학교 때 “나라를 빼앗은 적국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하는 부일배 교사가 학생을 지도하니 이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하여 상대방과 싸울 정도로 한글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이때의 제자가 이은상, 이극로, 안호상 등이다.

 

▲  1946년 한글날 기념식을 마친 한글학회 회원들. 김윤경 선생을 비롯해 장지영, 김병제, 최현배 선생들이 함께했다. (출처='한글학회 100년사', 한글학회, 2009)

 

1917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흥사단 지부인 수양동우회 창립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배화여학교에 부임하였다. 1926년 일본 릿쿄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였고 1929년에 졸업했다. 그 해에 일본에서 돌아와 다시 배화여학교에 재직하게 되었다. 1934년에 진단학회 발기인에 참여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때 왼쪽 뺨을 맞아 왼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에 부임하여 국어·지리를 가르치다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었다.

 

해방을 맞아 국학연구회를 설립하여 국사와 국어를 강의하였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8년에 자주적인 교육협회인 불일회(不日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1960년 4월 연세대생에게 삼일정신을 계승하자고 하면서 독재정치를 비판하였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정치교수로 체포되었다. 1962년 연세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1963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65년 한일협정을 국민투표에 붙여 판정을 받으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한글운동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 창립회원이 되었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발기인 위원, 1931년 조선어학회에 관여하여 2, 5, 7대 간사를 역임하였다. 한글맞춤법 통일안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참여하였고, 1931년, 1932년, 1934년 조선어강습회 강사에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었고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해방 뒤에도 조선어학회 간사와 이사를 맡았다.

 

서덜랜드 알랙산더(Sutherland, Alexander, 1852-1902, 호주의 철학자)는 󰡔도덕적 자극의 기원과 성장󰡕(Origin and growth of the Moral Instinct)에서 사회발달에 따라 (1) 야만인 (2) 미개인 (3) 문명인 (4) 문화인으로 나누었다. 그는 조선인을 문명인 중 열등 문명인으로 분류하였다. 열등 문명인은 석벽으로 두른 성채 도시를 짓고 석조의 견고한 건물을 가지며 전쟁은 특별 계급의 전업으로 되어 있고 문자가 크게 발달되어 문학이 생기고 습관법 이외에 간단한 성문법이 있어 정식의 법정과 재판제도가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 안남인 부탄인 캄보디아인 등도 이에 속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일본인 중국인은 고급문명인에, 서구라파인은 문화인에 소속시켰다. 이는 전형적인 진화론에 입각한 서구우월주의 사고이다.

 

이에 김윤경은 서덜랜드가 조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열등문명인에 소속시켰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먼저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우리는 과연 ‘中華’를 알고 三皇五帝를 알고 富士山을 알고 神武天皇을 알고 한문, 가명, 한자, 독문을 알되 조선을 모르고 단군을 모르고 백두산을 모르고 훈민정음을 모름니다.”(「人類社會發達程道의 分類」, 《동광》7호, 1926.11.1.)

 

그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만을 알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는 당시의 상황을 지적한다. 자기가 자신을 모르고서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을 안 된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자는 자기가 자기를 주장할 수 없고 딸아서 남의 수모와 主掌을 받게 되는 것이외다. 쏘크라테쓰의 명언이 ‘너 자신을 알아라’한 것이었음니다. 그러한 즉 우리가 모르는 우리를 더군다나 수만리 밖에 있는 써덜랜드가 어찌 똑바루 알겠음니까.”(같은 글)

우리 민족은 이미 거북선이 있고, 활자 인쇄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등 문명인이 아니라 고등문명인이라고 한다.

 

“열등 문명인의 열에 그가 배열한 어느 민족과 비교하더라도 여러 가지 점으로 지나칠 것은 물론이고 중등문명인의 열에 있는 민족들과 비교할지라도 지나치게 된즉 적더라도 고급 문명인(그가 말한 표준과 그 열에 있는 민족들과 우리가 가진 문화정도를 비교하여)의 열에는 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같은 글)

 

이러한 정신은 그의 유치원교육관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외국 신화나 동화를 쓰지 말고 조선의 현실에 맞는 우리 신화나 동화를 쓰자고 한다.

 

“어른도 모르는 외국동화나 신화를 들려주기 때문에 생활풍속이 전혀 다른 사회에서 된 사실을 어린이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겠으나 조선생활의 배경으로 된 것을 특히 편집해야 졸업하고 나갈 때 곧 그것을 재료로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노래도 장난감도 유희도 다 이런 정신 밑에서 조선의 현실을 토대삼아 어린이에게 감명을 주도록 특별히 준비하여 지도했으면 훌륭할 것입니다.”(〈조선중앙일보〉, 1925.11.21.)

 

그는 얼이 있는 인간을 양성하자고 주장한다. “삭 받고 마지못해서 움직이는 일꾼을 길러냄이 아니고 위대한 어머니 노릇을 할 사람, 위대한 선생 노릇을 할 사람, 위대한 동무 노릇을 할 사람을 길러 냄이 근본정신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같은 글)

 

김윤경은 스승인 주시경이 기독교에서 대종교(단군교)로 개종하였음을 지적하였고, 자신도 기독교인지만, 단군을 함께 존중하였다. “예수와 단군님의 돌아가신 날(어천절)이므로 휴교하고 근신기념하다.”(1914.4.10. 음3.15, 일기) 그는 홍익인간과 화랑도 정신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한 정신이라고 한다. “단군의 건국 정신인 널리 사람 사회에 유익을 끼친다(홍익인간)함이라든지, 삼국 시대에 신라의 화랑도의 정신이라든지, 다 주체성을 확립한 민족교육의 길이었다 하겠습니다.”(「우리민족 교육의 갈길」, 《한결 김윤경 전집》6, 308쪽) “자기의 문화를 높이어 스스로가 행복과 번영을 누리고, 남에게 침략을 당하지 않도록 주체성을 확립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약한 이웃 민족이나 세계 인류에게 어떠한 은택을 끼치도록 노력하자는 정신입니다.”(같은 책)

 

그는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 국수주의가 아니라 보편적인 이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단군조선에 관해서 “전설이든지 사실이든지 막론하고 그만한 시대(즉 서기전 2333년부터 1286년까지)가 시간상에 잇엇든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며 그 시대에도 朝鮮民族의 선조가 잇엇을 것은 사실이외다. 그러하면 壇君朝鮮은 곳 이 시대의 朝鮮을 가르친 것이라 보더라도 틀린 것은 없을 것이외다. 또한 그 때에 쓰든 말을 朝鮮 말의 범위에 집어넣는다고 하여도 아무 이의가 없을 것이외다.”(「조선문자의 역사적 고찰」, 《동광》22, 1931.6.1)라고 하여 단군조선시대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단군조선의 말을 조선말의 범위에 넣었다. 아울러 부여, 한족조선(기자, 위만조선), 예, 옥저 등도 조선말로 인정함으로써 한민족의 언어적 동일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조선사의 영역에 관해서는 “백산흑수의 중간 즉 송화강 유역을 중심삼고, 점차 남방 반도부까지를 그 무대로 삼아 발전된 문화와 그 인근에 대한 국제적 관계를 호상 영향됨을 연구하는 것”(「역사를 처음배우는 이에게」, 《배화》2, 1930.5)이라고 하여 역사의 무대를 만주지역까지 확장하였다. 조선역사도 신화시대-단군시대-부여시대로 구분하여 신화와 단군조선을 분리하였다.

 

김윤경은 기독교인이지만 주시경의 영향으로 민족정신을 가지게 되었고, 단군조선을 인정하고 단군조선의 말을 조선어에 포함시킴으로써 민족적 동일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역사의 고비마다 양심을 지키고 행동함으로써 민족주의자의 올바른 표상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