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민간단체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실시한 ‘서울의 관광진흥을 위한 역사문화체험’ 아홉 번째 체험이  24일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이날 서울시민 150여 명이 참가했다.

 

 지난 4월 시작한 '서울의 관광진흥을 위한 역사문화체험‘에서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시작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 조선의 궁궐을 돌아보고 5대 고궁 중 마지막으로 남은 경희궁을 탐방했다.  경희궁을 어떻게 찾아가느냐는 문의전화가 유독 많은 것을 보고 이곳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궁궐인지 알 수 있었다.

▲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대일항쟁기 우리의 문화유산은 곳곳이 파괴되었는데 특히 이곳 경희궁은 거의 모든 모습을  잃었다. 일제는 우리나라에 일본인을 이주시키면서 그 자녀를 교육하는 학교를 이곳 경희궁에 지었다. 그 학교가 바로 경성중학교였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역사를 보면 수난의 역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궁을 훼손하면서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다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인 박문사()의 산문()으로 사용하였다.

▲ 숭정전.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광복이후 박문사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신라호텔이 들어서게 되면서 흥화문은 호텔 정문이 되고 말았다. 1994년 경희궁 복원계획에 의해 흥화문을 옮겨오려고 보니 원래 자리에는 이미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고 도로가 생겨 제 자리에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자리에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 번 훼손된 문화유산은 다시 원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훼손된 기간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또 다른 삶이 이어지기에 되돌리기가 어렵다.  이런 아픈 역사를 알고 둘러본 경희궁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그 모습을 찾고자 애써 다행스럽기도 하다.

▲ 경희궁에는 왕기가 서려있다는 바위인 서암이 있다. 광해군은 왕기가 서려있는 바위가 있다는 풍수사의 말을 듣고 이곳에 궁을 지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경희궁에는 왕기가 서려있다는 바위인 서암이 있다. 광해군은 이곳 경희궁터에 왕기가 서려있는 바위가 있다는 풍수사의 말을 듣고 이곳에 궁을 지었다.  요즘도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조상의 묘자리를 옮기고 풍수가 좋다는 곳에 집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런데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정성을 들이면서도 정작 높은 위치에 오른 후 그 위치에 걸맞은 책임감과 성실성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하늘이 준 기회를 살려 선정을 펼친다면 짧은 인생동안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인데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음이 안타깝다.

▲ 서울역사박물관의 한양 육조거리 모형 앞에서 해설사의 해설을 들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오후에 찾아간 서울역사박물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오랜 역사와 전통,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다양한 전시물들을 통해 알아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한양을 도읍으로 삼은 이유를 통해 예로부터 서울이 청계천과 한강이 흐르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 운종가 등 조선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를 현재의 종로와 동대문 시장과 비교하며 알아보니 흥미로웠다. 양반가와 고관대작들이 많이 살았던 북촌, 의관이나 역관 등 전문직이 많이 살았던 중촌, 딸깍발이 샌님이라 불리던 벼슬얻지 못한 선비들이 살았던 남촌 등 지역에 따라 살았던 도성사람들의 삶도 재미있는 모습이었다.

 

대일항쟁기 일본에 의해 변모된 경성의 모습과 6.25전쟁 중의 힘겨운 삶을 거쳐 근대화를 일구어 내고 지금 우리에게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물려준 윗세대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간도 곧 역사가 된다는 것을 교훈삼아 소중히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