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이란 단어가 낯선 세대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지로, 가족 나들이 장소로 중·고등학교 시절 사생대회하던 그곳을 창경원이라 불렀다.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었고, 연못에서는 뱃놀이했다. 하늘에는 케이블카가 있었다. 조선태조 때 만든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위에 앉아 도시락을 먹던 그곳. 왜 창경원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고 흐드러진 벚꽃을 즐기러 가던 곳.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지원사업인 ‘역사도시서울의 관광 진흥을 위한 문화유산체험’ 탐방으로 우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무심함을 묵묵히 지켜보며 옛 모습을 찾아가는 창경궁에 17일 갔다.

▲ 국보 제226호 창경궁 명정전,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위해 마련했던 수강궁터에 1418년 창건한 궁이다.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부터 건물들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

▲ 보물 제386호 옥천교, 궁궐의 정전에 들어설 때  정전의 정문과 궁궐 대문 사이를 흐르는 금천 위에 있는 다리이다.

동향한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금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그 위에 창경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조물인 옥천교가 보인다.


옥천교를 건너니 명정전의 중문인 명정문이 보인다. 다른 궁과 달리 삼문(三門)이 아닌 이문(二門)이다. 옥천교 위에서 명정문과 명정전을 보면 축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넉넉지 않은 지형을 고려하여 문의 축을 살짝 틀어주어 전체적인 중심축의 변화를 느낄 수 없게 한 지혜를 볼 수가 있다.  또한, 다른 궁의 법전과 달리 동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배산임수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여 자연의 입지를 순리적으로 활용한 것 같다.

 다른 궁에 비해 공간이 좁고 동선이 짧고 방향도 다른 것은 법궁(法宮)이 아닌 별궁(別宮)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광해군일기'에 창경궁 중건 시 남향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광해군이 선대의 일을 거역할 수 없다며 그대로 동향으로 중건했다고 한다. 명정전의 내부는 다른 궁과 비슷하지만 소박하면서 멋스러운 고풍스러운 격이 느껴진다. 

▲ 왕이 정사를 살피던 편전, 다포계 건물이며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문정전이다.

명정전을 돌아보고 나니 명정전을 등지고 남향한 문정전이 보인다. 편전의 기능을 하였던 문정전도 창경궁 외전 중 유일한 남향 건물이다. 

  중종이 승하하였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요절했을 때 빈청으로 사용하었던 환경전은 통명전과 달리 용마루가 있다. 남향한 환경전은 동향한 경춘전과 같이 부속건물이 사라지고 없어 넓은 공간이 어색하게 앉아있다.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경춘전은 인현왕후와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다. 정조가 태어나기 전 혜경궁 홍씨가 용꿈을 꾸었다고 한다. 

원래 온돌시설이었던 것을 일제가 통마루를 깔아 놓았다. 창경궁 침전의 중심건물 통명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연못을 조성하여 여인들에 대한 배려가 보인다. 월대를 쌓고 드므를 설치하여 중궁전의 격을 높여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은 용마루가 없다. 

▲ 보물 제818호 통명전, 창경궁 내전이며 왕의 생활공간이자 연회장소로 쓰였던 곳이다.

통명전은 노론과 소론의 권력투쟁에서 파생된 비극적인 사건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다는 자경전은 고종 10년 화재로 없어졌다.  1911년 일제는 박물관을 지었고 후에 장서각으로 쓰였다. 1992년 녹지가 되어 숲이 잘 가꾸어져 있지만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자경전 터 동쪽에 있는 풍기대와 앙부일구는 왕이 국정을 운영하면서 자연 현상을 살피고 책임져야 했던 것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

춘당지 왼편 숲에 성종대왕 태실비는 원래 경기도 광주 경안에 있던 것으로 일제가 1930년경 역대 임금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길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 춘당지, 창경궁 내에 있는 연못이다.

창경궁 후원 영역에는 표주박 모양을 붙여 놓은 모양의 연못이 있다. 위쪽 연못이 춘당지이고 아래쪽 연못과 그 일대는 임금이 친히 농사를 짓던 내농포이였다. 이곳 내농포를 일제는  연못으로 만들었다. 
 1907년 일제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면서 전각 60여 채도 파괴했다. 창경궁 동식물원이 문을 연 것은 1909년 11월 1일이다. 17만 평이라는 규모는 당시 동양 최대였다. 일제는 일본에서 벚꽃 나무 수천 그루를 가져와 심었다. 1911년 4월 26일에는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원(苑)은 사냥이나 놀이를 즐기는 곳이니 궁궐을 유원지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어버렸다.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공원이 되어버린 창경궁을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으로 되살리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 많은 전각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에서는 왕실생활의 체취가 느껴진다. 많은 아픔과 추억이 있는 창경궁, 아픔을 잊기보다는 그 아픔을 묵묵히 안고 가는 창경궁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