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곳곳에 커다란 설탕포대와 유리통이 등장한 것을 보니 매실이 수확되는 철이다.

양력 6월 5일을 전후하여 24절기의 정점이자 아홉 번째 절기인 망종(芒種)이 돌아왔다.

옛 사람들은 보릿고개인 소만(小滿)을 지나 이 무렵이면 햇보리를 먹게 될 수 있었다는데, 요즘의 풍경은 보리보다 새파랗게 익은 매실이 먼저다.

망종을 일러 ‘니환궁’으로 가는 길이라는 표현을 썼다. 니환궁은 산스크리어트어로 ‘열반’이라는 뜻의 니르나바(Nirvana)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불교용어인 듯 보이지만 실은 도교에 뿌리를 둔 말로 니환궁은 옥황상제의 처소를 일컫는다. 도교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에서도 매우 중요시했던 니환궁은 무엇 때문에 삼교의 명소가 되었을까?

니환궁 주변의 한쪽은 온갖 약초들이 무성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 쪽은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평탄한 공간이요, 그곳을 지나 궁 안으로 들어가면 먼지 하나 없는 텅 빈 곳에 정작 옥황상제는 보이지 않고, 신령한 신(神)들만이 끊임없이 모여든다고 전해진다. 신들이 오가는 이곳에 오기 위해 수많은 수행자들은 험난한 수련을 마다하지 않았다. 니환궁에서 수행자들이 얻으려는 것은 바로 불로장생의 영액(靈液)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망종을 시작으로 두 달 동안은 평범한 사람들도 니환궁에 갈 수 있고, 그곳에서 신비로운 영액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

음력 5월이자 양력 6월은 오월(午月)이다. 망종은 오월의 시작을 연다. 오(午)는 오행으로 보면 뜨겁게 타오르는 화(火)의 기운이다. 1년 중 가장 크고 뜨거운 화 기운을 품고 있는 달이 바로 망종기인 오월(午月)인 것이다. 물론 무더위는 양력 7, 8월이 절정이지만 그때는 습기가 많은 찜통더위이고, 하늘과 땅의 화기가 치성한 때는 오월(午月)부터이다.

오(午)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 사이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간에는 정수리 정 중앙 뜬 태양을 피할 도리가 없다. ‘오(午)’라는 글자가 절굿공이를 세워놓았을 때 그림자 하나 없는 모양 그대로를 본떴다고 하니 가장 높은 꼭대기의 정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불덩이를 품은 오월의 정점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 해 망종에 이르러서 누구나 니환궁에 다다르게 된다는 말은 뜨거운 화기가 절정에 도달해야 온 몸을 돌아 마침내 정수리로 그 화기가 터져 나간다는 의미이다. 물론 우리 몸에도 니환궁이 있다.

누군가 “니환궁은 정작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머리에 구궁이 있는데, 가운데 있는 것을 니환궁이라 한다. 그 궁이 늘어서도 칠규(七竅 사람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가 상응하여 통하는데, 그 중 니환궁은 혼백이 사는 곳이다. (동의보감 외형편 ‘두頭’ 444쪽)

그렇다면 뜨거운 화기가 온 몸에 가득 차 정수리 백회에서 ‘펑’ 하고 터지는 것이 니환궁이라는 말일까? 들여다보면 볼수록 영액을 찾아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니환궁의 보배인 영액은 망종을 기점으로 음력 5월과 6월, 두 달동안만 받을 수 있고 다른 날에는 가게 되더라도 빈손으로 나오게 된단다.

그런데 이 영액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영액은 다른 말로 풀면 정(精)이다. 동의보감에는 ‘정(精)’이라는 항목이 따로 있다. “정은 몸의 근본이며 지극히 보배로운 것 (精爲身本 精爲至寶)”라는 설명과 함께 은밀하게 숨겨 잘 간직해야하며 수련을 해서 아껴야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렇게 귀한 것이 그냥 주어질 리 없다.

영액, 다시 말해 정(精)을 얻고 싶은가? 정이라는 한자를 보면 쌀 미(米)자가 보인다. 역시 동의보감에서는 “정은 곡식에서 생긴다”고 했고, 오곡의 담담한 맛이 정을 채울 수 있게 한다고 적혀 있다.

천상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눈을 돌려보면 그제야 답이 보인다.

망종은 1년 중 농사일이 가장 바쁜 철이다. 오죽하면 망종에는 “발등에 오줌 싼다”,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 “별 보고 나가 별 보고 들어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망종에는 보리를 재빨리 수확하고 그 자리에 모내기를 해야 하니 밤낮없이 일을 해도 일손이 모자랄 때이다.

망종이라는 이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망(芒)자는 풀(艸)이 시들어서(亡) 된 까끄라기를 뜻한다. 까끄라기로 된 곡식을 파종하는 시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때에는 일 년 농사 중 가장 중요한 쌀농사를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것이 연결된다. 화기가 치성한 오월(午月)이면 농부들의 몸에도 화기운이 머리까지 꽉 차게 되고, 그것이 가열차게 파종을 하는 힘이 된다. 망종에 비지땀을 뚝뚝 흘리며 농사일에 정점을 찍고 나면 마침내 정(精)의 영액인 쌀이 주어진다. 이런 과정을 위해서는 오줌 눌 새도 없이 움직이는 고된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여름의 뜨거움과 열정은 이런 고난을 함께한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태양이 뜨거운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농활이며 국토대장정이며 사서 고생하는 일들을 만든다. 내면 깊이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은 무더위 앞에 자포자기하는 일상이 아니라 장애를 딛고 넘어선 후의 뿌듯함과 충만이 아닐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액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정(精)은 때로는 곡식으로, 또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사람을 낳고, 나에게 머물면 나를 살아가게” (동의보감 내경편 ‘정精’)하는 힘이 된다.

망종에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는데 모든 기운을 다 써야 일 년을 배불리 먹고살 듯, 우리도 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삶의 농사를 지어야 하리라. 달려라. 힘들면 걸어서라도, 기어서라도 뜨거움과 열정을 다 해 니환궁에 가보자. 그리고 모두들 그곳에서 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영액을 얻어오기 바란다. 망종의 시절, 서로에게 건투를 보낸다.

<참고도서>

절기서당 (김동철, 송혜경/ 북드라망)

갑자서당 (류시영, 손영달/ 북드라망)

24절기에 대한 연구 (안종은/ 대전대 석사학위 논문 2001)

동의보감 (홍문화/ 실크로드)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고미숙/ 북드라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