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소(小)에 가득 찰 만(滿). 양력 5월 20일을 전후하여 여름절기의 두 번째 관문인 '소만'이 찾아왔다.

만물이 가득 차오르는 절기를 '소만'이라고 했던가. 때가 그러하듯 요즘의 산과 들은 초록의 절정을 보여준다. 여름 꽃이 향연하고, 생기를 머금은 초록 잎사귀들이 햇살에 찰랑인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시절에도 명암(明暗)은 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보릿고개는 소만 즈음에 찾아왔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식량은 계절을 거치며 모두 사라졌고, 가을걷이까지는 아직 까마득한데, 먹거리가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쥔 보릿고개는 푸르른 이 계절에 찾아왔다.

옛 기록에는 소만의 첫 닷새 동안을 씀바귀가 뻗어 오른다(苦菜秀)고 한다. 이는 쓰디쓴 씀바귀를 입으로 질겅질겅 씹으며 태산 같이 높은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배고픔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이 시절에는 농사거리가 차고 넘친다. 당장 먹을 것은 없지만, 앞으로 수확할 먹거리를 위해 이른 모내기와 보리베기, 김매기, 풀베기 등으로 농부들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배가 부르면 나른해지지만, 보릿고개의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오늘 일하지 않으면 내일 굶는다는 생각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손끝은 야무지게 했으니 가을수확의 기반은 소만의 성실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뱃속은 비어있지만 마음은 옹골지게, 계절은 충만하지만 보릿고개로 굶주리는 시절. 결국 가득 찰 만(滿)은 텅 빌 공(空)과 짝을 이루어야 존재한다. 채워야 덜어낼 수 있고, 비워야 채울 수 있는 음양의 이치는 여기에도 있다.

소만의 보릿고개는 농사일 뿐 아니라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터로 총출동하여 일손을 도와야하는 시절에는 누구나 제 몫을 하며 생존을 위한 생산에 참여하고 살아남아야만 했다. 사시사철을 몸으로 체험하여 견디고 통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존재를 실감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소만은 성년의 날을 전후해서 찾아온다. 장미와 키스로 상징되는 성인식에는 공허한 축하만이 오갈 뿐이다. 그래서일까? 고대 원시 부족사회에서는 성인식의 일환으로 다양한 통과의례를 고안해냈다. 통과의례를 통해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여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성년의 날이 그저 기념일로만 여겨지는 것은 이 시대의 성년과 미성년의 구분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의미 같다. 어쩌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미성년의 상태로 사이좋게 동반하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만에 접어들 무렵에는 잃어버린 계절의 통과의례를 스스로 만들어보는 것도 좋다. 옛 사람들이 그러했듯 씀바귀를 씹으며 기아체험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결핍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충만해지는 좋은 방법은 바로 '욕을 먹는'일이다. 욕은 씀바귀 못지않게 쓰고, 속이 얼얼해지지만, 제대로 소화만 시키면 아이에서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기 때문에 만물이 쑥쑥 자라난다. 그래서 위정자는 이 시절에 무너뜨리거나 부수는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이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잘 키우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사형집행도 가을로 미루고, 오로지 인재의 등용과 성장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훌륭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이 필요하다. 요컨대 인재는 쓴 소리,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욕'을 먹음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만에는 화기(火氣)가 치성해져 양기(陽氣)가 밖으로 드러난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양기를 돕는 작용이 있는데, 소만이 되면 중려(仲呂)에 해당하는 율(律)이 천기기운에 응한다. 중려는 12율려(律呂)의 하나로 양(陽)을 도와 공적을 이루는 중화(中和)한 기운을 베푼다. 즉, 여름이 되었다고 해서 양기가 저절로 펼쳐지고, 만물이 자라는 것이 아니다. 양기의 배후에는 중화의 기운이 버티고 있다. 이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인간도 그냥 자라지 않는다. 수많은 단련을 감내해야 견고한 자의식을 내려놓게 되고,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몸을 만들 수 있다. 무엇이든 받아들이니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한변용(無限變用)'의 가능성이 활짝 열릴 때 존재는 거듭날 수 있다. 욕먹고, 수용하고, 성장하는 것보다 좋은 통과의례는 없다.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것은 말이 쉽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즈음, 다시 봄의 절기를 환기해보자. 입춘에 계획을 세우고, 우수에 마음을 녹였으며, 경칩에 과감해지고, 춘분에 갱신을 했다. 청명에 미혹되지 않고, 곡우에는 현장에 달라붙는 봄의 절기는 비교적 혼자서도 충분히 지날 수 있었다.

봄과 여름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름의 실전은 더 이상 혼자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실전은 곧 생산을 말한다. 소만에 접어들면 농부의 일손이 한층 바빠지듯 우리의 삶 또한 바삐 움직여야 할 때다. 봄에 세우고 품어온 계획은 여름에 실전으로 옮겨야만 한다. 이런 실전의 생산은 삶의 현장에서 타인과 함께할 때 이루어진다.

봄의 절기를 통과하며 공부한 모든 강령은 결국 타인과 어우러지기 위해 필요한 훈련이었던 것이다. 욕을 먹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실전에 들어서면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어도 울컥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돌보아야 할 장기는 토(土)를 상징하는 비위이다. 위가 건강해지는 음식과 체조로 위를 튼튼히 단련할 때 소만의 시절 역시 성장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음식도 먹는 것이고 욕도 먹는 것이니 과장하자면 음식과 욕 모두가 먹는 계열이다. 음식을 잘 소화시켜야 기운을 차릴 수 있는 것처럼 욕도 잘 소화를 시켜야 인생의 보약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본격적인 한여름의 길목에서 소만을 만났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이 시기를 만(滿)하게 할 것인가? 칭찬과 위로와 격려도 좋다. 하지만 욕도 먹다보면 그 맛을 알게 될 것이다. 소만에 가득 채운 욕은 무더위를 버티는 힘이 되는 동시에 가을 추수를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 믿는다. 좋은 욕으로 나의 정신을 살찌우고, 타인과 함께하는 시절, 소만이 우리에게 주는 충만한 메시지이다.

2017년 5월 20일 소만을 맞이하여

[참고자료]

절기서당 (북드라망)

국역 율려신서 (문진출판사)

예기 (지만지 출판사)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그린비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