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각가 이홍수씨

아직도 ‘단군’하면 ‘단군신화’를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마저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사실이기 보다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현실에서 단군 시대에 대한 역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10년 동안 오로지 단군상만을 만들어 온 조각가가 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동대학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한 이홍수(50)씨 는 현대미술과 설치미술만 주로 작업해오던 작가였다. 그런 그가 단군상을 처음 조각한 것은 1997년(단기 4330년)말 무렵이다. 우연히 단군상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큰 고민 없이 시작했던 작업을 어떻게 10년간 지속하면서 1만 5천개가 넘는 단군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처음에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는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었습니다. 25일 만에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러자면 원 형태를 만드는 데 겨우 일주일 밖에 여유가 없었어요. 당시에는 작업 자료도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작업을 통해 그는 단군에 대한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느 작가들이 작업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물상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인물의 밑바탕에 깔린 생각이나 철학, 생활방식까지 모두 다 알아야 그 사람을 충분히 느끼고 이미지를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역사 공부는 그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 이홍수씨가 조각한 단군상


“제가 처음 단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지식은 일반인과 똑같았습니다. 곰이 여자가 되어 낳은 아이가 단군이며 그 단군이 우리나라를 세웠다는 옛날이야기 정도였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터넷도 뒤져보고 단군 관련 물품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과 대담을 나누고 학술단체도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민족의 상고사와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고조선문화를 접하고 배울 수 있었지요. 그건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그렇게 밝고 찬란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그 때부터 많은 사람에게 우리역사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단군상 작업은 역사를 알리기 위해 씨앗을 뿌리는 일이었다. 당시, 때마침 ‘IMF 위기’를 맞아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우고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단군의 역사를 알리고자 했던 시민단체 ‘한문화운동연합’(현 홍익문화운동연합)으로부터 작품의뢰를 받았다. 그 때부터 그는 쉴 틈 없이 작업에 몰두했었다. 시민단체의 의뢰와 그의 뜻이 합해진 작업에 수많은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주었고 그 결과 전국 각 학교와 공원에 369기의 단군상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단군상을 설치한 후,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리던 그에게 처음 날아든 소식은 ‘단군상의 목이 잘렸다.’는 말이었다. 작가로는 뜻밖의 시련이었다.

“처음에는 두려웠습니다. 막상 설치가 끝난 직후에는 사회적으로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작가들은 작품 전시를 하고나면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보니 허전한 느낌도 들고 두렵기도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훼손사건이 터지니 겁도 나고 대처방안도 고민되었죠.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단군의 건국역사를 왜 우리 스스로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훼손사건을 피하지 않았다. 훼손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현장으로 가 보수를 했다. 연락이 오는 대로 바로 가서 복구를 했고 복구가 여의치 않으면 작업장에 대기하고 있던 새로운 단군상으로 교체했다. 학교에 세워진 단군상이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목이 잘린 단군은 곧 상처 입은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작업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를 물어보니, 뜻밖에도 설치과정이라고 했다. 밀양 동광중학교에 단군상을 설치할 때는 지게차 바퀴가 빠져 설치하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릴 정도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30분이면 해 낼 작업을 그렇게 진땀 흘리며 해야 했다.

“미국 애리조나 세도나에 설치한 단군상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때 단군상을 배에 선적한 후, 저는 비행기로 출발해서 먼저 현장에 도착해 있었어요. 그리고 단군상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도나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올라가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두 대의 트레일러가 보이더군요. 거기가 사막이라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오는걸 보고 있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울컥하고 올라왔어요. 생전 안 흘리던 눈물도 흘렸지요. 이역만리 타국 땅에 우리 민족의 홍익철학과 역사를 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어떤 것보다 감격적이었지요.”

강단에도 서고 개인전도 여러 번 치른 예술가로서, 그에게 작품으로의 ‘단군’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다.
“하나의 순수미술로서 조각을 했지만 항상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어요. 항상 서구미술의 조류에 끌려 다니면서 깊은 곳에 답답함이 깔려있었는데, 바로 ‘한국성’이라는 부분입니다. 특히 순수미술 쪽에서는 어느 평론가나 작가도 ‘한국성’에 대한 답을 내리기가 힘듭니다. 저는 이 작업을 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제가 단군상을 통해 우리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알리고 살리는 일을 하지 않습니까.”

단지 피상적인 상이 아니라 단군상을 통해 홍익철학이 살아있는 우리 역사를 알리고 싶다는 이홍수 씨는 자신의 작품이 대중에게 대접을 받거나 숭앙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역사를 알고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살리는 존재였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꾼다. 갈수록 퇴색되는 우리역사와 문화가 한 예술가의 손끝에서 살아나고 있음을 그와의 대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