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균(申明均, 1889-1940)의 호는 주산(珠汕)이다. 서울출신이다. 그의 모습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한글학자, 교원, 출판사 경영, 대종교인이다. 먼저 한글학자의 모습이다. 그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주시경을 만나서 조선어강습원에 들어간다. 조선어강습원은 중등과와 고등과가 있었는데, 중등과는 3회(1912), 고등과는 1회(1913)로 마쳤다. 권덕규, 김두봉, 이병기, 장지연, 최현배가 그의 고등과 동기생이고, 정열모는 3회이다. 이후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발족하자 거기에 참여하였고, 1926년에는 간사가 되었고, 1927년 󰡔한글󰡕잡지의 편집과 발행인이 되었다. 1929년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언문철자법회의 참여하여 우리의 철자법을 주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한글철자법 강연회와 한글강습회를 개최하여 한글을 보급화하고자 하였다. 1931년에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를 바뀌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932년에 간사장, 1933년에 회계감사를 역임하였다. 1932년에 다시 《한글》을 복간하였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앞장섰다.

그는 한편 교원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1914-22년까지 독도(뚝섬)공립보통학교, 1927년 보성전문학교, 1930-1934년까지 동덕여고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신명균은 중앙인서관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신소년》 등의 잡지를 간행하였다. 이는 최남선과 방정환으로부터 시작된 청소년에 대한 관심을 계승한 것이다.  《신소년》은 청소년 교양잡지로 그의 주도로 한편으로는 정열모, 맹주천 등의 대종교인을, 다른 한편으로는 권경완, 이주홍 등의 사회주의 계열까지 참여시켰다. 좌우합작의 길을 모색한 것이다. 그는 김교헌 유근의 《신단실기》와 권덕규의 《조선유기》, 그리고  사회주의의 의거한 《사회주의 개론》과 《노동독본》도 함께 출판하여 사상적 균형을 취하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문학전집》의 시조집, 가사집, 소설집을 편찬하여 조선의 문화를 소개하고자 하였다.
그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중앙청년회에서 활동하였고, 영고탑에서 열린 대종교 교의회에 1924년 전후로 두 번이나 참석하였고, 지교라는 당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우드머니 무엇을 명상을 하시다가도 우리가 가면 자리를 내주시고 나가신다”(홍구, 「주산선생」, 《신건설》)고 할 정도로, 일상생활에서 명상을 실천하였다.
신명균은 대종교인으로 자결한 대표적인 세 명 가운데 한 분이다. 나철은 일제의 종교령에 맞서 구월산에서 죽음으로써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는 방향을 제시하였고, 서일은 밀산부 당변진에서 청산리 전투이후 자유시 참변과 부하들의 몰살에 따른 책임으로 자결하였다. 신명균의 자결에 관해서는 “이 때 동덕여학교에는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개명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신명균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반제투쟁의 회상(상)」, 현대일보, 1946.4.17.)라고 하는 공산주의자 이관술의 평가가 있고, 국문학자 조지훈은 “창씨문제가 나왔을 무렵에 신명균선생이 그 스승 나철 선생의 사진을 품은 채로 자결하셨다”(고대신문, 1955.10.31.)라고 같은 평가하고 있다.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자결한 그를 좌우 모든 계열에서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명균은 영고탑에서 열린 대종교회의에 갔다 와서 「우리의 옛땅을 밝고 와서」(《신소년》, 1924.7)라는 기행문을 발표하였다.

“우리들의 선조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문명도 해보셨고 남들이 설설길 만한 위엄도 부려보셨습니다. 이처럼 온갖 자랑과 호령을 부리시던 땅은 이 반도보다도 저 넓고 넓은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등이었습니다. 5천년동안이나 되는 오랫동안에 자자손손이 살던 곳이니 끼쳐 놓으신 자췬들 얼마나 많았겠으며 살어진 자췬들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중에 혹은 단군 때의 무엇이니 부여의 무엇이니 발해의 무엇이니 고려의 무엇이니 하여 말로만 남아 있는 것도 잊고 혹은 자취만 겨우 붙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단잠을 못 주무셔 가며 애를 쓰시고 고생하시던 일이며 의리있고 용맹있고 맘씨가 훌륭하시던 것은 백년천년에 눈비를 무릅써 가며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저 백두산이 낱낱이 알 것이요 밤낮 쉬지 않고 철철 흘러가는 저 송화강 흑룡강이 역역히 보았으련마는 답답한 저 산과 강이 말을 못하니 이를 누구더러 물어 볼까요? 그래도 얼마 되지는 않으나마 더러 있지만 있는 옛 자취를 잘 보관하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끼치신 뜻의 만일이라도 엿볼 수 있을 것이요 또 우리 자손된 사람의 도리도 되겠지요.”

그는 만주가 단군 이래 우리 땅이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 자손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자취를 보관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조선민족이 신덕이 높은 환검을 임금으로 삼고, 단군이 백두산 신목 아래 대궐을 세운 이래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가 조선반도는 물론, 러시아 연해주지방, 만주전역, 동몽고, 중국 본토의 황하연안까지를 조선민족이 밝고 다닌 땅으로 보고 있는 역사관에서 나온다.(《신소년》, 1925.8)

신명균은 특히 영고탑 주위의 발해의 동경성을 답사하고, “조선사람이 조선 옛터에 다시 들어와 살면 이 만주가 다시 조선의 땅이 된다는 전설”이 있어서 동경성에 조선사람을 들이지 않다가 당시에 우리 동포가 70여호 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 조선 내지에 있는 여러분 보다 훨씬 활발하고 생각이 굳셀 뿐 아니라 몸들이 다 건강하여 추위를 잘 견디고 맘들이 착해서 서로 사랑하여 친형제 같이 지내니 기후는 비록 추운 지방일망정 봄날 같이 따뜻한 和氣는 언제든지 넘쳐 있습니다.”
그는 만주 전역에 300만 명이 이주해 있고, 다섯 집마다 학교가 있어, 어떤 촌이든지 학교가 없는 곳이 없고 공부를 아니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는 장래 조선을 위하여 크게 기쁜 일이라고 한다. 그 중 영고탑의 간민(墾民)제일소학교의 창가시간을 참관하고, “나아가 나아가 ***(싸우러-필자) 나아가”라는 독립군가를 부르는 소리에 “어찌 그랫든지 흐르는 줄 모르게 하염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십데다”라는 하여 한국인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을 피력하고 있다.

“옛부터 남들이 우리 조선사람은 가르쳐서 ‘美人’이라고 하고 우리 조선나라는 가르쳐서 ‘군자국’이라고 하며 중국의 공자같은 성인도 우리 조선에 와서 사시기를 원하신 것은 다 이 까닭이올시다. 인제 다시 우리 조선사람이 세계적으로 ‘미인’이 되고 우리 조선이 세계적으로 ‘군자국’이 되고 안되는 것은 다 여러분 소년에게 있습니다.”

신명균은 단군조선이래로 한국이 미인이고 군자국을 지향하고 있음을 주지하고 청소년에게 다시금 세계적으로 이러한 나라를 만들 사명이 있음을 주장한다.
신명균은 대종교인으로 단군의 정신을 이어서 한글운동을 지켜나갔고 출판운동을 하였으며, 좌우를 통합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그를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지 않았다. 그를 독립운동가로 선정해야 할 것이다.(신명균의 생애에 관해서는 이용규, 「일제시대 한글운동에서 신명균의 위상」(《민족운동사연구》, 38. ,2008)을 참조하였고, 원종찬 님의 자료제공에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