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에 배움의 뜻을 두고 (志于學 지우학), 서른에 자립했으며 (而立 이립), 마흔이 되자 미혹함에서 벗어나 (不惑 불혹), 쉰이 되자 천명을 알았다 (知天命 지천명). 예순이 되자 귀가 순해졌고 (耳順 이순), 마침내 일흔이 되자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從心所慾不踰矩 종심소욕불유구)."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孔子)가 말한 그의 일생이다. 짧지만 자서전의 일종이다. 이 인생의 프로세스에는 야망과 열정, 성공과 좌절의 스토리 따위는 없다. 유년기의 콤플렉스와 첫사랑의 아픔 따위는 더더욱 없다.  그저 물 흐르듯 생의 리듬을 밟아가는 배움의 인생!
이것은 공자였기에 가능한 특출한 인생의 리듬이 아니다. 마흔에 ‘불혹’이라 함은 공자 역시 그 전에 수많은 미혹에 빠졌다는 뜻이고, 쉰에 ‘지천명’이라 함은 그 전에는 천명을 알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순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자가 외적으로 무엇을 이루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의 몸과 마음의 변화가 배움과 존재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불혹과 지천명, 이순을 거쳐 마침내 일흔이 되자 ‘욕망과 능력’, ‘마음과 이치’가 완벽하게 조응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 이것이 공자가 밟아간 ‘공부의 길’이다.
그것은 인간의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가능하게 한 동력은 다름 아닌 ‘배움’이기 때문이다. 열다섯부터 인간과 삶에 관한 탐구를 시작했고, 서른이 되자 두 발로 설 수 있었다는 말은 청년기의 공부가 마침내 자립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청년을 청년답게, 장년을 장년답게 보냈기에 공자는 마음가는대로 해도 거스름이 없는 종심(從心)의 노년을 맞이했다.
사계절의 흐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주는 사계절의 리듬을 밟는다. 봄, 여름의 기운과 가을, 겨울의 기운은 다르다.
전자는 발산하고, 후자는 수렴한다. 인생 또한 자연과 같아서 계절의 변화처럼 나이에 맞게 몸 상태가 변화한다. 몸이 달라지면 감정과 동선도 달라지는 법이다. 만약 이 차이를 무시하고 동일한 척도와 의미를 부여하면 모든 것에 심한 엇박이 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런 엇박을 부추긴 주범이다.
자본은 생장과 번식의 봄, 여름만을 강조할 뿐, 수렴하고 휴식하여 다음을 준비하는 가을, 겨울은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소유하고 증식할 뿐, 버리고 비우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인생을 청년기에만 묶어놓은 격이다.

 자본주의에는 청년의 야망, 즉 노동과 화폐와 에로스를 어떻게 증식할 것인가에 대한 공학과 기술만 있을 뿐, 노동 없는 삶, 화폐 없이 사는 법, 욕망 없는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자란 우리는 어쩌면 진정한 배움의 과정 없이 청년기를 통과했다. 그래서 우리는 길 위에서 길 찾기, 곧 인생의 서사를 잊어버렸다.
중년 이후의 이념과 가치는 오직 ‘안티 에이징’이다. 마흔과 쉰이 되어도 스무 살의 피부와 몸매를 갈망한다. 그렇게 우리시대의 중년들은 젊음을 질투하며 청년기를 모방하고 표절하며 사느라 애를 쓴다. 억지로 열정적인 척 하면서, 피부의 골든타임을 지키느라 안간힘을 쓰면서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하고 우기면서.

[참고도서]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고미숙 저)

신은정 (체인지TV 책임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