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안재홍(=위키피디아)

안재홍(1891~1965), 호는 민세, 경기도 평택 출생, 본관은 순흥, 부는 윤섭, 모는 남양 홍씨, 8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경주 이씨 정순과 결혼.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 입학, 1911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입학, 1914년 졸업, 1915년 중앙학교 학감,  1919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입, 총무가 되었다가 체포되고 1922년 출옥함. 이후 6번에 걸친 감옥살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1924년 시대일보가 창간되자 입사하여 논설 기자가 됨, 1924년 조선일보 주필, 뒤에 부사장, 사장을 역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총무간사가 됨,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됨, 국민당 조직, 한성일보 창설 사장 역임, 1947년 민정장관 역임, 1950년 납북, 1965년 서거하였다. 
 
대종교와 관련해서 1917년 대종교도가 됨. 1930년 「조선상고사관견」을 조선일보에 연재, 백두산 등산하고 󰡔백두산등척기󰡕 간행, 1934년 구월산을 등산하고, 「구월산등람지」를 동아일보에 연재, 󰡔여유당전서󰡕를 교감, 1937년 한국상고사에 대한 저술을 시작함, 1944년 󰡔삼일신고주󰡕를 저술, 1949년 대종교 정교, 원로원참의 역임하였다.
 
한글과 관련해서는 1928년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6년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이 되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안재홍은 정치가 언론가로 알려졌지만, 대종교인이자 한글학자였다. 그는 단군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바탕으로 당시 단군부정론을 비판한다.
 
“최근에 일본 학자들로 단군을 부인 말살하는 자가 있으니, 학술적으로 왜곡의 나무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만일 정략적이라면 거의 쓸모없는 일이다. 한양조의 유생사가라는 자가 왕왕 이를 부인하는 바가 있었으나 그들 漢化(중국화)의 골망병자들의 눈에 비친 탄생담이 다소 기괴하였기 때문이나, 그 허망이 원래 일고의 가치 없는 것이며, 조선의 신진학도란 자들이 혹 새로운 것을 따르고 기이한 것을 자랑하려고 특수한 일파 학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입내 내어 단군을 부인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결국 천박한 짓일 뿐이다. 다만 단군사를 연구하면서 회의도 하고 검토를 가함으로써 더욱 그를 천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또 거의 그 의미를 달리하는 자이다.”(「단군과 단군사」,조선일보 1930년 7월 5일자)
 
당시 단군을 부정하는 자로 일본인 학자, 유학자, 신진 학도들이 있는데, 이들의 주장은 모두 왜곡한 것, 허망한 것, 천박한 짓이라고 규정하고, 그는 단군을 제대로 연구하고 밝히는 것이 의미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단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단군을 삼국유사는 환웅으로부터 부계혈통을 이야기하는데 비해, 제왕운기는 단웅으로부터 모계혈통을 주장한다고 한다. 단군은 단웅의 외증손자이다. 그러면서 모계사회에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고 한다.(󰡔조선상고사감󰡕 132쪽) 그가 모계혈통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의 역사관과 관련이 있다.
 
“아득한 고대 원시적인 여성 중심의 혈족사회에서 모계의 최대 권위를 가지고 신의 일을 주관하는 족장의 지위에 있는 분을 ‘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 아지 어머니는 관직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존경을 표시하는 호칭으로 ‘아씨’라고 불렀으며 아씨가 지배한 땅을 ‘아씨땅’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아사달이라고 한 것이다. 사회기구는 처음에는 채집경제의 토대 위에서 시작하였으나 차차 수렵경제의 시대를 지나 채소밭을 가꾸는 등 농경의 방법을 인식하게 되었고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씨족 공동체사회는 이미 남계중심의 체제로 전이되었는데 남계의 수장 중에 가장 영웅적인 인물이 나타나 신인과 같은 숭배를 받았다. 수장은 세력을 확대하여 여러 부족의 추대를 받아 덩얼(덩걸) 왕금의 지위에 올랐다. 덩얼은 하늘 또는 천왕으로 매우 영험하다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왕금은 위대한 임금(위대한 신 또는 위대한 황제라는 뜻)이니 후세에 단군왕검으로 일컫는 분이다. 아사달을 중앙의 수도로 삼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그런데 수도인 아사달은 백악산이라고도 하고 평양성이라도 불렀다.”(같은 책, 98-99쪽)
 
안재홍은 채집·수렵시대에 여신이 먼저 있었고(삼신 할머니), 정착시대에 남성의 단군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인류학적인 사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인류학에서는 모계사회와 부계사회로 나눈 뒤, 그 중 모계사회가 먼저 존재하였고, 그로 인해 신 역시도 여신이 먼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채호나 최남선과는 다른 생각으로 삼신할머니의 여성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환인에 대해서 안재홍은 그것이 불교식 의미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진방 고유의 사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남선이 환인을 버리고 환국을 선택한데 비해, 안재홍은 환인을 신으로 인정하면서도 환국 또한 인정한다.(같은 책 362쪽) 그에 따르면 “환웅의 ‘환’이 광명 또는 크다는 뜻이고, 단웅의 ‘단’은 달이란 뜻으로 환자와 혼용되었다”(같은 책, 368쪽) ‘웅’도 ‘매우 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환웅이란 큰 광명의 신을 뜻한다. 
 
그는 단군의 이상이 홍익인간 사상에 있음을 주장한다.
 
“홍익인간 그것은 현대에서도 민중 대중 그리하여 당면과정에서는 결국 민족인으로서의 사회에 존립하는 의식이요 염원으로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각 층 각 방면의 사회적 처지를 달리한 모든 사람들이 현재 과정에서 ‘각 길로써 한 곳에’의 구호와 함께 이 홍익인간을 하는 일념으로 전심 전진할 바이다.”(「단군과 개천절」, 조선일보 1935년 10월 29일)
 
단군학의 의미는 홍익인간 사상에 있고 홍익인간 사상은 민주 민족의 이상과 합치하는 것이다.
 
“역사 발전의 이면에 잠긴 불멸의 구원성이 있나니 전시대를 통하여 항상 최선 또 최대한 바로 잡아 구제하려 의도를 파지케 하는 인류의 도의적 충동 그것이요, 이를 만일 단군을 통하여 본다면 곧 홍익인간의 큰 서원인 것이다.”(「단군과 개천절」, 조선일보 1935년 10월 29일)
 
더 나아가 홍익인간 사상은 인류의 영원한 가치인 것이다. 안재홍은 삼일신고에 주석을 달면서 1에서 10까지의 숫자를 새롭게 한글로 정의한다. 
 
하나는 한(하늘), 둘은 들(땅), 셋은 세(씨), 넷은 네(나, 자아의 실현과 민족자존), 다섯은 다사리(만민공생, 조선상대의 민주주의), 여섯은 이어서(지속, 영원 창조와 무한한 진화), 일곱은 일의 곱(일의 매듭, 의식과 도덕으로서의 세계), 여덟은 열고 닫는 것(역사적 도정), 아홉은 아우름(회통 종합), 열은 여는 것(무한 전개의 역사성)이다. 
 
이는 한글과 개인 국가 우주의 역사성을 연결한 것이다. 안재홍은 일제의 탄압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에 한글과 단군에 대한 연구를 집중함으로써 그것의 역사적 가치와 홍익인간 사상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것이 그의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 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조남호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법학연구단 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겸 국학연구원장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이황과 이이'(김영사 2014), 역서로는 '강설 황제내경1,2'(청홍 2011), 논문으로는 '주시경과 제자들의 단군에 대한 이해' , '선조의 주역과 참동계연구 그리고 동의보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