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 마리산 전경(사진=강화군청)

지난달 23일 강화도 마리산(摩利山, 472.1m)에 오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단군이 천제를 지낸 성산(聖山)이 아닌가? 918계단을 오르는 중간에 주위를 둘러보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고려 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은 마리산을 답사하고 “신선이 사는 곳에 오르니 넓은 바다 먼 하늘 만 리나 터졌네”라는 시를 남겼다. 산마루엔 단군이 천제를 지낸 참성단이 보인다. 

참성단의 이름은 성(城)을 파서(塹) 단(壇)을 쌓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고려 황제 또한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인근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는 삼랑성이 있다. 고조선 유물인 고인돌도 많으니, 강화도는 단군문화유산의 보고(寶庫)라고 하겠다.
 
계단을 오르면서 목적지인 참성단이 아니라 조상들이 떠올랐다. 참성단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돌과 자재를 날랐을까? 선조들의 땀과 눈물이 있기에 수천 년이 지나도 후손들은 뿌리를 잊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쌀쌀한 날씨로 코끝이 찡해도, 단군의 후예로서 마음만은 따뜻해진다.
 
참성단에 오르기 전에 강화도 역사부터 살펴봐야겠다. 이곳은 단순한 섬이 아니다. 유라시아를 제패한 몽골군에 맞서 39년간 고려인들이 결사항쟁을 벌였던 수도가 아닌가? 대일항쟁기보다 더 오랜 시간을 대몽항쟁으로 조국을 지키고자 했던 곳. 천혜의 요새라는 강화도에서 몽골군과의 전투를 벌인 선조들이 떠오른다. 그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정찬주 작가는 소설 <단군의 아들>에서 독립운동가 나철(羅喆, 1863~1916)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몽골군이 강화도 바다를 건너오지 못헌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허네. 최우가 강화도 들어온 것은 단군대황조님을 의지해서 배수의 진을 친 거라 마시. 제천단에 올라 천제를 지내불고 난 뒤 몽고 대군과 40여 년 동안 맞서 싸와부렀는디”
 
물론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고(故)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당시 해안선이 지금과 달라서 강화도와 육지 사이가 넓지 않았을까 추정했다. 
 
아무튼 강화도가 단군의 성지로 주목된 것은 고려인들의 역사계승인식에 있었다. 
 
서영대 인하대 사학과 교수는 “거듭되는 몽골의 침입에 저항하면서 고려왕조는 어느 때 보다 내부의 단결이 필요했으며 이에 따라 분열을 조장하는 역사계승의식도 극복되어야 할 대상의 하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국조로서의 단군인식”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천도파의 일부 인사들이 강화의 유적을 단군과 연결 지음으로써 강화 천도의 당위성을 선전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일항쟁기에 단군정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것처럼, 대몽항쟁기에서도 강화도 단군유적은 고려인들의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대일항쟁기에서 지식인들이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에 맞서 단군의 역사를 저술한 것처럼 대몽항쟁기 지식인들 또한 단군으로 시작하는 역사서를 펴냈다. 일연(一然, 1206~1289)은  《삼국유사》의 〈고조선조>를 통해 고려의 역사가 중국과 완전히 다른 출발점을 제시했다. 이승휴(李承休, 1224~1300)는 《제왕운기》에서 부여, 비류국, 신라, 고구려, 옥저, 예맥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암(李巖, 1297~1364)은 1363년 정계를 은퇴하고 강화도 해운당(海雲堂)에서 《단군세기》를 펴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호라, 슬프도다! 부여는 부여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한족이 부여에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고, 고려는 고려대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와서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에 부여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한인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며, 고려에 고려다움이 있었다면 몽고 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라.”
 
이암은 나라를 구하는 것은 역사에 있고, 그 모습을 가지려면 얼(Spirit)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즉,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國猶形) 역사는 혼과 같다(史猶魂)는 것이다. 
 
신운용 박사(사학,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는 “유교와 불교만으로 홍건적의 고려 침략을 막을 수 없던 역사적 상황에서 고려를 보존할 수 있는 사상적 무기로 단군론을 내세운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이승휴가 그의 조부 이존비李尊庇(이인성 李仁成)에게 보낸 시를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실은 점을 미루어볼 때 이승휴와 이암 가문의 일정한 관계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참성단을 가보자. 겨울철 개방시간은 오후 4시까지다. 늦기 전에 서둘러야겠다.(계속)
 
■ 참고문헌

박성수, 《단군문화기행》, 석필 2009년
신운용, 〈조선건국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시론〉, 《한국사의 단군인식과 단군운동》, 국제평화대학원출판부 2006년
서영대, 〈단군인식의 변천〉, 《고조선사연구100년》, 학연출판사 2009년
윤이흠, 서영대 외, 《강화도 참성단과 개천대제》, 경인문화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