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음력 11월 19일은 양력으로는 12월 17일이 된다. 1598년 이날 이순신 장군께서 순국하셨다. 남해 노량물목의 거센 물살이 밀고 나는 차가운 관음포(觀音浦) 앞바다에서 큰 별이 떨어진 것이다. 지리산에서 거목을 찍어 물에 띄우면 해류를 타고 작은 포구에 모두 모이게 된다.  바닷물에 절어 단단해진 나무로 나라의 안위를 빌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새겼다고 그 포구를 관음포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이후, 경남 하동군 노량일대(현 남해대교 인근)의 관음포 앞바다를 남해민들은 ‘이락파(李落波)’라고 불렀다. 구국의 마지막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께서 목숨을 바친 물길이란 뜻이다.

 그곳에는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현판이 붙은 이락사(李落祠)가 서 있다. 역시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돌아가신 곳이라는 의미이다. 장군께서 순국한 지 234년이 지난 1832년(순조 32)에 통제사 이항권이 왕명으로 건립하였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명나라 수군 제독이자 조명(朝明) 수군의 총사령관인 진린은 이순신 장군의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된 진린은 곧바로 제갈공명처럼 하늘에 빌어 수명을 늘리라고 권한다. 그러나 장군은 '오직 하늘의 뜻을 따를 뿐'이라고 거절하고 결국 겨울 바다에서 돌아가신다. 원균의 무고로 옥에 갇혀 생사가 오갈 때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위하여 단 한 톨의 구명의사를 비치지 않은 것이 장군의 사생관이다. 장군에게는 오직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뜻만 있을 뿐이었다.

▲ 이락사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언비. <사진=장영주>

 

매년 그렇듯이 올해도 그 날에 즈음하여 국학원 회원들과 이락사를 찾아 참배를 올렸다. 이락사에서 10여 분 거리의 바다 쪽으로 솟은 언덕에는 '첨망대'가 있다. 그 자리는 부하들이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운구하여 육지에 처음 내려 모신 곳이라고 전한다.  첨망대에 올라 탁 트인 바다를 보면 자욱한 화광이 치솟는 소리, 거센 파도 소리, 조명일 삼국의 운명을 건 장졸들의 결사 함성이 들린다. 이순신 장군이 북을 치며 싸움을 독려하고, 갑옷을 풀어 적함을 향해 진격하여, 마침내 총에 맞아 돌아가신 광경도 한눈에 보인다. 

한 잔 술과 향을 피우고 장군과 당시 함께 죽어간 조명일의 삼국의 수군과 조선의 백성들에게 절을 올린다. 바다를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자니 지금의 나라 생각과 겹쳐 그저 눈물이 흐를 뿐이다.

 되돌아 내려오는 길 위에 흩어진 새털이 낭자하다. 아마도 산새가 짐승에게 잡혀 먹힌듯하다. 애처롭지만 약육강식은 자연계의 질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비극이 되고, 나라에 이르면 그 참상을 어찌 다 이를 수 있으랴. 우리뿐 아니다.  1937년 12월 13일 중국에서는 일본군이 ‘난징대학살’을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안이나 밖이나 나라가 약해지면 반드시 닥쳐오는 참상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락사 입구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언비가 서있다.

"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사랑하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지금 몹시 위중한 역사의 물목을 통과하고 있는데 국력은 날로 약해지고 있다. 엄혹한 국제 정세라는 거친 물살 위에서 한배에 탄 심정으로 국민 모두 오직 화합해야 한다. ‘큰 나’에 이르기 위해 '작은 나'의 사리사욕을 소리 없이 죽이듯이 비워내야 한다. 그로써 모두가 화합하여 홍익(弘益)의 마음으로 상생해야 한다. 그럴 때야만 거센 물목을 통과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약진하는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홍익’ - 오직 그 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