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걷기왕' 스틸컷

강화도에 사는 고등학교 1학년 만복(심은경)은 선천성 멀미증후군이 있습니다. 자동차나 버스를 타면 심한 구토를 일으킵니다. 때문에 왕복 4시간을 걸어야 학교에 오갈 수 있습니다. 지각이 많을 수밖에요. 

담임교사(김새벽)는 만복이 성적이 좋지 않고 특기도 없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녀는 《꿈을 향한 열정과 간절함》이란 책을 성경처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는 말처럼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자기계발서에 취한 사람입니다.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만복이가 자기의 목소리가 아니라 담임교사의 말만 믿고 경보(Race Walk, 競步)팀에 들어간 것입니다. 교사는 왕복 2시간을 걸을 수 있다면 운동에도 자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죠. 진짜 그럴까요?
 
선생은 육상 코치(허정도)에게 만복을 소개합니다. 여선생을 짝사랑하는 육상코치는 만복에겐 관심이 없지요. 3학년 경보 에이스 수지(박주희)에게 맡깁니다. 전국 체전을 목표로 연습합니다. 그런데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는 속담은 만복에게 적용하기 알맞습니다. <쿵푸 팬더(Kung Fu Panda)>의 ‘포’처럼 좋은 스승을 만나서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한다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지는 마라톤 선수였다가 부상을 입었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경보로 진로를 바꿔서 도전하고 있습니다. ‘목숨 걸고 하자’는 그녀에겐 만복이 한심할 수밖에요. 아무런 재능도 열정도 없는 만복에게 “공부는 하기 싫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으며, 운동은 왠지 쉬워 보여 하는 게 아니냐”며 말합니다. 부모 또한 딸에게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을 줍니다.
 
반면 만복의 단짝 지현(윤지원)은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입니다. 그녀의 꿈은 의사나 판사가 아니라 공무원이 되는 것이죠. ‘칼퇴근’하고 집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쉬고 싶다고 합니다. 오늘날 성공보다 안정이 최고라는 엔(N)포세대(연애와 결혼은 물론 인간관계까지 포기하는)를 대변한다고 하는데, 글쎄요. 국민세금으로 일하면서 아무런 국가관도 없는 공무원이 넘친다면 그 피해는 국민이 아닐까 싶네요. 
 
세 명의 학생은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불굴의 도전을 펼치는 운동선수 수지, 공무원으로 안정적으로 살겠다는 모범생 지현, 이것도 저것도 아닌 평범생 만복. 어쩌면 영화는 특별한 재능도 노력도 없는 만복과 같은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만복은 우여곡절 끝에 전국체전에 출전합니다. 그런데 강화도에서 서울까지 버스를 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녀의 멀미중후군 때문이죠.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만복이는 밤새 걷는 것을 택합니다. 주목할 것은 수지가 동행합니다. 알고 보니 수지는 길을 찾지 못하는 ‘길치’입니다. 만복과 수지가 동행하자 멀미와 길치라는 각자의 단점은 사라집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은 수지와 만복을 통해 보여줍니다.
 
▲ 영화 '걷기왕' 스틸컷
 
만복은 기적처럼 금메달을 딸 수 있을까요? 그러면 상업영화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립영화라 그런지 감독은 관객에게 환상을 심어주지 않습니다. 2016 리우올림픽 펜싱경기에서 ‘할 수 있다’라고 반복해서 외친 박상영 선수가 기적과 같은 역전승을 거둔 일은 운동선수에게나 가능한 것입니다. 만복은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고 대자로 누워버립니다. 가족과 친구, 고향 사람들 그 어떤 남의 기대도 부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몸에 맡길 뿐입니다. 성공을 내려놓으니 행복이 가득한 표정입니다.
 
만복은 경보를 그만두고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걸어서 서울까지 가본 그녀가 가지 못할 곳은 없을 것입니다. ‘통일한국에서 시베리아까지 걸어서 여행하는’ 만복의 꿈도 언젠가 이뤄지겠죠. 평범생의 도전과 실패는 또 다른 자기 발견의 시간입니다. 공부와 운동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한 방향으로 학창시절을 보내는 수지와 지현과는 다른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 이전에 자신의 길을 찾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생은 레이스(Race)가 아니라 각자의 인생이라는 가방을 짊어지고 오르는 등산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최근 '대청마루'(대한민국 청소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모임, 대표 김권우)는 ‘대한민국 교육 바꾸기 청소년 100만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찾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주체가 10대 학생들이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들의 요구에는 자유학기제가 아닌 자유학년제로 1년 동안 꿈과 재능을 찾을 수 있도록 충분한 자유 시간을 줄 것이 있습니다.
 

유엔이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에서 2년 연속 행복지수 1위를 차지한 덴마크에서 시행하는 ‘에프터콜레’라는 인생학교와 같은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1년 동안 교과목이 아닌 다른 분야의 재능을 개발하면서 보내는 성숙의 해입니다.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의 날이 제정된 것도 일제에 항거한 광주지역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기성세대를 탓하거나 현실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대청마루’를 비롯한 청소년들의 움직임은 훗날 미래를 바꿀 변화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1등 아니면 실패라는 ‘성공사회’가 아니라 학생 모두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성숙사회’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