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근대국학의 선각자인 홍암(弘巖) 나철(羅喆·1863~1916)의 순국(殉國)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전라남도 보성군은 11월 2일 홍암나철선생기념관 개관과 함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추모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날은 음력으로 10월 3일이다. 음력 개천절이 되는 것이다.
나철은 1863년 전남 보성군 출신으로 유학자로 살았다. 1905년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에 대해 “매국노를 죽이면 국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라며 1907년 실행에 옮기려던 우국지사였다.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를 통한 구국운동을 벌인다.
이후 단군신앙을 접하고 1909년 음력 1월 15일 서울에서 대종교를 중광(重光)했다. 중광이란 이미 창시되어 있는 가르침을 거듭 빛낸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단군신앙을 통한 국학운동을 전개했다.
나철은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있다)’라는 대의(大義)로 꺼져가는 조국의 불씨를 다시 살리고자 했다. 단기연호를 사용하고 개천절을 제정하는 등 선도문화(仙道文化) 부흥에 주력하였다. 불과 5~6년 만에 30여만 명이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에 놀란 일제가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였다. 다른 모든 종교단체의 신청은 접수하면서 대종교만은 거부하였다. 나철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천제를 올리고 자결(=순국)하였다.
그의 제자인 서일(徐一)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부하인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를 진두지휘했다. 김교헌(金敎獻)은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역사서를 펴냈다. 김두봉(金枓奉)과 최현배(崔鉉培)는 한글을 지켰다. 나철이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