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가 담긴 책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칼럼은 《징심록澄心錄》 <부도지符都誌>와 그 저자 박제상에 대해서, 다음 칼럼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징심록》은 신라시대 박제상(363~419(?))이 저술한 책으로 본래 <부도지>, <음신지>,<역시지>, <천웅지>, <농상지>,<의약지> 등 모두 15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역사, 농사, 의학, 역법(曆法,달력) 등 우리 선도의 제 분야를 망라한 방대한 책이었습니다. ‘선도’는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가 유입되기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전통입니다.

▲ 《징심록》<부도지>를 쓴 신라 충렬공 박제상 공의 영정(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영해박씨 대종회 보유).

《징심록》은 박제상을 시종조始宗祖로 하는 영해 박씨 문중에서 비밀리에 전해져 오다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분실되었습니다. 이를 한탄한 55세손 박재익(1895~1961, 후에 박금으로 개명)이 어린 시절부터 익혀 왔었고, 젊은 시절 동아일보 기자로서 번역까지 하려했던 《징심록》 중 제1지 <부도지>를 기억에 의존하여 복원해내게 됩니다.

<부도지>의 ‘부도符都’는 하늘 뜻에 부합하는 나라, 또는 그 나라의 수도라는 뜻으로 곧, 단군의 나라를 말합니다.

<부도지>는 선도의 철학과 역사를 담고 있는데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고신화라 불리는 마고의 천지창조 이야기부터 마고성 일만 이천의 인조人祖(인류시조)들로 인해 천지가 안정과 조화를 찾는 이야기, 지소씨의 잘못으로 마고성을 나오게 되는 이야기, 성을 나온 후에는 장자였던 황궁씨 후예들의 역사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황궁씨 후예들의 역사는 성을 나서기 전에 황궁씨가 마고 앞에서 한 맹세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맹세는 “사람들이 반드시 본래의 천성을 되찾게 하겠다.”는 복본複本의 서약이었습니다.

‘부도符都’는 하늘 뜻에 부합하는 나라, 곧 단군의 나라
… 한민족의 선조 황궁씨로부터 이어진 역사는 ‘복본의 맹세’를 실현하는 과정

이 서약은 황궁씨에서 유인씨, 환인씨(환국)를 거쳐 환웅씨(신시배달국)로, 다시 임검씨(단군왕검)로 이어지고 단군왕검은 그 정신으로 고조선을 건국합니다. 하늘의 법을 옳게 전달하고, 본래 마고성에 함께 살다가 출성이후 서로 멀어진 종족들이 만나 화합을 이루기 위해 부도가 건설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초에 중원일대는 선도문화권에서 떨어져 나가고 거기 선도는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 후 중원지역은 조화와 상생의 선도문화가 아니라 지배의 문화가 횡행하여, 전쟁이 그치는 날이 없었습니다. 지배와 권력, 욕망으로 점철된 문화는 끊임없이 침투해 들어와 선도문화의 전통이 약해진 고조선을 끝내 망하게 합니다. 동해의 물가로 피난해온 고조선 유민들은 6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박혁거세를 시조왕으로 하여 신라가 건국됩니다. 신라는 그렇게 고조선을 이어 부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선도이념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첫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쓴 이로 유명한 김시습은 세종대의 인물로 영해 박씨 일가와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는데 그가 《징심록》을 읽고 <징심록추기>를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징심록》에 기록된 신라 개국 이전의 아득한 역사는 ‘비단 한 문중에 전해진 것만이 아니요, 공(=박제상)이 보문전(왕실도서관)에 이찬(신라의 관등)으로 있던 10년 사이에 반드시 그 상세한 것을 얻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김시습은 또 《징심록》이 유․불․도 삼교가 들어오기 전에 써졌으며, 오히려 후에 생겨난 사상들의 원류가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 불교, 유교를 도입한 후대 왕조들에 의해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징심록]은 공개적으로 전해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 김시습 <징심록추기> 기록…“후대에 들어온 유․불․도 삼교의 원류”

그러나 조선의 세조 이전까지는 이 책의 내용이 상당히 알려져 있었고 선도의 위상도 은근히 높았던 듯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때 이 문중에 자문을 구했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도 영해박씨 종가와 차가의 후예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성균관 옆에 거주하게 하고 장로로 임명하여 편전에 들게 하며 우대하였습니다. 참고로 왕은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징심록》에서 취하였다고 합니다. 세종과 이렇게 가까웠던 그들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반기를 든 것은 당연합니다. 세조는 그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그들은 산간벽지로 숨어들게 됩니다. 이후 세조는 수서령收書令을 내려 선도 문헌들을 강제로 거두어들입니다. 이에 《징심록》은 박씨 집안 삼신궤 밑바닥 깊이 보관되어 비밀리에 전해지게 됩니다.

▲ 경기도 성남 영해박씨 대종회가 보유한 영정과 위패 (왼쪽부터 박제상 공의 딸 효녀 아경, 아들 백결문량, 충렬공 박제상, 국대부인 김씨, 딸 효녀 아기).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도 나라세울 때 박씨 문중에 자문 구해

이제 저자인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박제상은 박혁거세왕의 9세손이며, 박씨왕이었던 5대 파사왕의 적통 5세손입니다. 신라 왕실을 이루는 박․석․김 3대 씨족 중 하나인 박씨족 핵심가문이며, 유서 깊은 선도 장로가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27세 때 보문전 이찬이 되고, 다시 왕명으로 서북지방과 각 진鎭을 돌아다녔는데 그의 강개한 성품은 탐관오리들이 박제상의 이름만 듣고도 관직을 버리고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36세 때는 삽량주(현 경남 양산) 간干(長)이 됩니다. 당시 삽량주는 고구려․ 신라 對 백제․ 왜․ 가야 간에 전쟁이 빈발하던 곳이었는데, 신라 건국의 주체로서, 선도 장로로서 최일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습니다.

내물왕이 갑자기 죽고 실성왕이 즉위하자 박제상은 실성왕의 ‘고구려 종속노선’에 반발하여 41세 한창때의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실성왕 치세 15년 내내 삽량주에 은거하였습니다. 《징심록》은 이 시기에 집필된 것입니다. 그는 실성왕의 사위였으면서도 그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배후에서 눌지반정을 성공시키는 주역이 됩니다.

실성왕이 즉위했을 때 왜에는 내물왕의 셋째아들인 미사흔을, 고구려에는 둘째아들인 복호를 인질로 보냅니다. 왜,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위함과 동시에 정치 라이벌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큰아들 눌지는 벙어리인양 말을 더듬거려 화를 피했다고 합니다. 이후 눌지는 왕이 되자 일차적으로 동생들의 귀환을 추진합니다. 이는 비단 형제애 차원을 넘어 실추된 신라의 국위회복을 위한 상징적 조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로 가 장수왕과 담판하여 복호를 귀환시키고, 일본에는 망명한 척 가장하여 왜왕을 속입니다. 미사흔과 함께 신라 정벌군의 안내자가 되어 신라를 향해 오다가 중간 기착지에서 틈을 타 미사흔을 도망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은 남아 왜왕의 회유와 고문에 굴복하지 않고 장렬하게 순국합니다.

박제상, 고구려 장수왕과 담판 “우리는 한 뿌리의 후예”, 볼모로 간 복호왕자 귀환시켜

사망 소식을 접한 부인과 첫째, 셋째 딸은 치술령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며 울다 자진하여 죽고, 둘째 딸은 가문을 위하여 굳세게 살아남아 당시 다섯 살배기 남동생을 기릅니다. 그가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 박문량입니다. 백결百結은 옷을 백 번 이상 기워 입었다고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55세손 박재익의 글에는 박제상이 고구려왕과 왜왕에게 가서 한 말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부도의 일, 한 뿌리의 후예로서 우호할 것, 구의舊誼(옛 구, 옳을 의)를 수호할 것’이었다고 합니다. 신라, 고구려, 왜가 모두 고조선의 후예로서 한 뿌리인 선도전통을 공유하고 있으니 상호 우호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박제상은 선도 전통에 대한 명확한 계승 의식을 갖고 당시의 국제관계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제상은 선도이념과 하나 되어 삶을 살았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요새말로 실세實勢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일선에서 나라를 지켰고, 신념에 맞지 않은 권력과 손잡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인질을 구해냈습니다. 또 [징심록]을 집필하여 선도를 후대에까지 알렸습니다. 박제상이 《징심록》을 쓰지 않았다면 <부도지>가 해주는 귀한 얘기들을 도대체 어디서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부인과 세 딸, 오십 넘어 얻은 늦둥이 외동아들까지도 뒤로 하고 왕의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박제상의 결연한 뒷모습을 그려보면서 철저히 공公을 우선으로 사신 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이 있지요. 프랑스 칼레에서 유래된 말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 풀이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엘리트인 만큼 사회를 위해 책임지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특권층일수록 사사로움으로 치우치는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을 보면서 선도 장로로서 공인公人 박제상이 삶과 죽음으로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잠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 김윤숙/ 국민인성교육강사, 찬란한 우리역사이야기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