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오르규(=Wikipedia)

오는 9일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25시>의 작가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는 루마니아 동부 몰다비아에서 동방정교회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신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요. 대신 군에서 운영하던 중학교를 마쳤습니다. 그럼에도 시를 써서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게오르규의 삶은 파란만장했습니다. 1944년 루마니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독일로 건너갔고 미 연합군에 의해 옥살이를 당했습니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1949년 파리에서 소설 <25시>를 간행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 또한 작가와 비슷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살다가 유대인으로 오인되어 헌병에 의해 징발당합니다. 이후 헝가리, 독일, 미국 등을 거치면서 고문을 당하고 수용소에 갇혀 고통을 겪습니다. 

작가는 25시라는 시간에 주목합니다. 

“25시는 모든 구원이 끝나버린 시간이라는 뜻이지. 최후의 시간에서 이미 한 시간이나 더 지나버린 절망의 시간,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순간이 바로 25시야.” 

기계를 닮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모리츠. 그의 모습은 오늘날 물질문명에 잠식당한 인류와 닮았습니다. 이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설에서 과거의 잠수함은 흰 토끼를 태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탁한 공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토끼는 밀폐된 공간인 잠수함의 공기 교체시기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이를 지구로 비유하면 25시로 넘어가기 전에 인류의 의식이 각성되어야 모두가 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백범 김구의 '홍익인간' 휘호 (서울옥션 제공)

게오르규는 기계문명이 앞서는 서양보다 동양에서 그 대안을 찾습니다.

“동양인은 기술사회를 극복하고 서구의 빛인 전깃불 앞에 굴복하지 않는 슬기로운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 슬기란 <조화의 재능>이지요. 나는 그것을 관현악의 지휘자 같은 재능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서양인들에겐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성벽을 쌓았고 모든 인간의 재능과 슬기를 그 성벽 안에서만 길러왔던 것입니다. 조화가 아니라 성벽에 의해서 인간의 환경을 주위로부터 단절시키려 한 데 그 비극이 있었지요. 성벽은 도시문명을 낳았고 도시문명은 인간의 오만 그리고 조화의 힘이 아니라 지배의 힘을 낳았습니다. 그 궁극에서 얻어진 것이 기술의 발전이었습니다. - 1974년 한국을 방문하기 전 파리 자택에서 이어령 교수와 가졌던 대담” 

게오르규는 ‘동방에서의 새로운 빛‘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빛은 무엇일까요? 한국을 5차례 방문하면서 강조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단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단군은 민족의 왕이며 아버지이며 주인입니다. 그가 한국 민족에게 내린 헌법은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홍익인간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일입니다. 이후 한국인은 다른 많은 종교를 받아들였지만 단군의 법은 변함없이 5천여 년 동안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군의 법은 어떤 신앙과도 모순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모든 종교나 철학의 이상적인 형태로 최대한의 인간을 위한 최대한의 행복 또는 모든 인류를 위한 행복과 평화입니다. - 한국찬가 25시를 넘어 아침의 나라로(범서출판사1984)” 

그는 아파트 정원에 무궁화를 심어놓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한국인의 얼이 담긴 꽃을 바라보았다고 하지요. 1992년 6월 22일에 눈을 감았습니다. 게오르규 작가가 한국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다시 읽어봅니다.

“당신들은 다만 당신들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가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왕자의 영혼을 지니고 사는 여러분들, 당신들이 창조한 것은 냉장고와 텔레비전과 자동차가 아니라 지상의 것을 극복하고 거기에 밝은 빛을 던지는 영원한 미소입니다.”

절망을 넘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영원의 미소’는 자꾸만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게오르규 탄신 100년을 맞아 홍익인간의 정신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