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양성'은 영상물을 통해서 본 우리 고대사로 나당 연합군과 고구려군이 대치하고 있는 당시 평양성의 상황을 코믹하게 그려낸 역사 영화이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에서도 평양의 위치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민성욱 박사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25년 1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평양패수고'에서 "지금의 패수인 대동강을 옛날의 패수로 알고, 지금의 평양인 평안남도 중심도시를 옛 평양으로 알면 평양의 역사를 잘못 알 뿐 아니라, 곧 조선의 역사를 잘못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사를 말하려면 평양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주장은 우리 고대사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역사지리의 여러 문제들이 바로 고대 평양에 대한 올바른 위치 비정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평양은 역사적 사실 외에도 남다른 감정이 작용하는 곳이다. 고조선의 도읍지로,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지로 당나라에게 패망하면서 북방지역의 거점을 잃어버린 아쉬움과 한이 서려 있는 곳으로 고려시대 이후 고토 회복의 동기를 부여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역사왜곡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여 고대 평양을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설정함으로써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내에 비정한다거나, 민족의 강역을 지금의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패수는 중국 한족과 우리 민족 간의 경계를 뜻하거나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지역경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조선 시기의 패수는 지금의 난하나 대릉하를 뜻하고, 고구려 시기에는 압록수, 즉 지금의 요하를 말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동일한 요하를 두고 고구려인들은 압록수라고 불렀고, 말갈인들은 마자수라고 불렀으며, 중국 한족들은 요하라고 불렀던 것이다. 요하는 요수라고도 불렀고, 중국 한족들 기준으로 보면 멀리 떨어져 있어 다른 민족과 구분하기 위한 자연 경계로서의 강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경계로 요동과 요서로 나뉘어 졌으며, 전쟁과 그로 인한 한군현 설치 등으로 인하여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경계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난하 혹은 대릉하에서 요하로 바뀌면서 요동과 요서의 지역개념도 바뀌게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서 요동은 각별한 곳이었다.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왕검성이 있었고,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평양성과 발해의 수도였던 중경 현덕부 그리고 낙랑군의 조선현과 현도군의 고구려현도 모두 요동에 있었다. 그 중심에 항상 평양이 존재했다.

고대 평양은 고유 명사라기보다는 도읍지로 할 만한 넓은 평야지역을 일컬었던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으로 본 고구려 천도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고구려 동천왕 때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기는 데, 이때의 평양을 두고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선인왕검의 택지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인왕검은 단군왕검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분명 고조선을 계승하고자 했던 고구려의 건국이념이자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다물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헌법이 '개물조화경'이었고, 애국가는 '다물흥방가'였다. 이러한 전통은 발해, 고려, 조선까지도 이어진다.

발해는 고왕 대조영이 동생 대야발을 시켜 단군조선의 역사서인 『단기고사』를 편찬케 했다.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서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을 수도로 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발해 3대 문왕 때 옮긴 도읍지, 중경현덕부다. 이것은 발해 5경 중 하나이다.
그런가 하면 발해와 함께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고려 때는 고구려 평양을 서경이라 하여 계승하였고, 국호 반영, 서희와 소손녕 간의 담판 내용,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세조 때 신하인 양성지에 이르러서는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의 선조국가가 고구려라고 되어 있다.

중국사서 중에 '평양'이라는 지명은 『위서』 「고구려전」에 처음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위세조 태원 원년에 사신이 고구려를 방문했는데 고구려왕(장수왕)은 평양성에 거처하고 있었다. " 만일 『위서』에 나오는 평양이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첫째, 고구려 영역에는 평양이 여러 곳에 있었다.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라고 부른 평양은 대릉하 유역의 북진 일대였다. 고구려 때는 지금의 대동강 유역의 평양을 평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지금의 북한 평양을 고구려 때는 장안성이라고 했고, 고려 때는 서경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고구려 시대에 평양이 한 곳만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시 여러 평양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된다.
둘째, 역사교과서에서는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고 천도한 이유를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소개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장수왕의 아버지인 광개토왕은 중국 대륙이 5호 16국으로 난립되어 있을 때 영토를 최대한 넓히며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한 광개토왕 조차도 요동지역의 후연이 건재하고 있어 서쪽으로의 진출에는 어려움이 있어 동진정책으로 거란, 백제, 신라, 왜 등을 평정하였다. 장수왕 때에 와서는 즉위 전에 후연이 멸망하고 북연이 들어선 시점이었다.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고 있었으니 북연이 고구려의 서부를 공격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장수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427년(장수왕 15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따라서 장수왕은 남진을 위해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말은 성립되기 어렵다.
셋째, 만일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대동강 유역 평양이라고 한다면, 427년부터 668년 멸망 때까지 241년 동안 동북아의 강국으로써 대동강 유역에 도읍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도읍지의 규모와 유적 및 유물이 백제의 122년 도읍지인 부여보다도 대단히 빈약하다는 점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렇듯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장수왕이 427년에 천도해 간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다"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 외에도 『요사 지리지』나 『원사 지리지』 등에도 고구려 평양이 요양에 있었고,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옛 평양과 다른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도 "고구려의 도읍지가 요수의 북쪽에 있다"는 표현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구려의 평양이라고 하면 지금의 북한 평양을 떠 올리게 되는 것은 조선후기, 당대 지식인들에 의해 고구려 평양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논쟁이 있었지만 그 논쟁이 결말을 보지 못하고 대일항쟁기 때 일본 역사학자들에 의해 대동강 평양설이 정설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광복이후에도 그 제자들에게 맡겨진 우리 역사는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우리 역사연구에 가장 중요한 문제라며 평양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은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고대 평양의 위치에 관한  인식이 새로운 물꼬를 트고 있다는 점이다. 학계에서도 학제 간 융합 연구 등 변화의 움직임이 있고, 역사교과서 서술에도 올바른 비정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역사학계의 역량이 역사인식에 관한 오류를 바로잡는 데 집중될 수 있도록 국민의 관심이 필요하고,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많은 지원이 뒤따라야 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