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68년 신학균이 규원사화 번역본을 낸 이후로 규원사화 연구는 다양해졌고 그 수준도 높아졌다. 하지만 앞으로 규원사화 연구를 넘어서 ‘규원사화학’의 탄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연구과제가 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략적인 연구과제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크게 대과제와 소과제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규원사화 원본 사진
 
우선 대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선가사관(仙家史觀)의 정립이 필요하다. 
 
한국사를 보는 시각이 여러 가지 있음을 분명히 보여야 한다. 유가사관·불가사관·도가사관·기독교사관·공산주의사관·자유주의사관 등 모든 사관은 역사를 해석하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역사교육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이지만, 사관이 연구방법이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역사학의 기본을 알릴 필요가 있다. 
 
특히 선도사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역사 기술은 사관에 따라 너무나 다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규원사화 연구 발전을 위해서는 선교사관의 확립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2) 선가류 사서와 경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연구기반 구축도 시급한 문제이다. 
 
유가사학이 한국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가사학의 이론을 연구하고 정착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선사(仙史) 연구에 대한 지원과 연구기관의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 
 
이 점에서 단군관련 단체들이 공동으로 단군관계 종합연구기관(대학원) 설립을 위한 협의회를 구성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그리고 남북의 공동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역사인식의 공유는 통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 신운용 박사(사학,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소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채호 등 선가사가(仙家史家)들의 상고사 기술과 규원사화를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신채호가 1931년 6월 18일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은 근래의 규원사화 위서설과 관련하여 대단히 주목되는 대목이다.
 
위서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태종의 분서(焚書)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다. 반면 우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支那)·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 될 책이 적지 않지마는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 쉽다.
  
여기에서 보듯이 신채호는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위서로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가 규원사화를 접했다면 이 역시 위서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2) 규원사화의 중요 용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규원사화 속에 담겨져 있는 용어와 그 출처는 신향(神鄕)(《한서》), 三一(《사기》), 대고(大誥)(《서경》), 대괴(과)(大塊)(《장자》), 주신(主神)(《일본서기》), 민기(民氣)(《여씨춘추》), 선민(先民)(《서경》), 천주(天主)(《天主實義》) 등이 밝혀졌을 뿐이다.
 
다른 사서에서 규원사화에서 사용된 용어를 국내외의 사서에서도 찾을 필요가 있다. 이는 규원사화의 성격을 확인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선민’이라는 용어는 《세종실록》에서도 확인된다.
 
3) 규원사화의 한국사상사 상의 위치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의 “이도흥치(以道興治)”, 신라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의 “국유현묘지도 왈풍류(國有玄妙之道, 曰風流)”, 고려 이승휴의 홍익인간(弘益人間), 고려의 팔관회, 여말선초의 단군론 등 규원사화와 선(仙)의 관계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구려 호태왕비의 이도흥치의 도는 선도(仙道)임이 분명하고 늦어도 호태왕비가 세워진 414년(장수왕 2)까지는 선도에 의해 고구려가 운영되었음을 이 비는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의 건국배경으로 선도가 강력히 작동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규원사화가 나올 수밖에 없는 가강 중요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규원사화와 대종교계통의 사서와 경서(經書)의 비교연구도 필요하다. 이는 규원사화가 적어도 여말선초와 근대를 잇는 매개체였음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4) 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이 요구된다.
 
《한(환)단고기》나 《단기고사》의 별자리 연구에서 보듯, 규원사화의 진위를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을 규원사화 연구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한(환)단고기나 단기고사와 같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5) 민족의식에 대한 동시대 타국(청국과 일본 등)의 상황을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민족의식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 인류사적 측면에서 주변국과 비교연구가 절실하다. 이는 선교사가 특수사가 아닌 보편사 속에서 성장해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연구이다. 특히 한민족의 선교와 일본의 신도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밝히는 일도 아울러 요청된다. 
 
6) 연구 분야를 다양화해야 한다.
  
신학·국문학·민속학·예술학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규원사화를 연구해야 한다. 이들 분야에서 연구된 규원사화는 아직 초보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 분야의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7) 위서 주장에 대한 반박기술(記述)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까지 연구만으로도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님이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더는 위서설을 반박하는 일은 무의미한 작업이다. 이제부터는 통사적이고 미시사적으로 더욱 치밀한 연구가 요청된다. <끝>
 
■ 주석
 
1)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31쪽;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단재 신채호 전집》 제1권 역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30쪽.
 
2) 이숙화, 《일제강점기의 천부경연구》, 국제뇌교육종합대학교 국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8, 39쪽 참조. 
 
3) 세종 38권, 9년(丁未) 11월 7일(신묘)조.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전조(田租)를 감하여 백성들은 곡식이 남아서 썩는 효력을 나타내었고, 선민(先民)들도 “1분(分)쯤 너그럽게 하면 백성이 1분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였으니(漢文帝減省田租, 而致紅腐之効, 先民亦曰: “寬一分則民受一分之賜)”(밑줄: 글쓴이)
 
4) 신채호는 “國有玄妙之道, 曰風流”의 풍류를 “國有玄妙之道仙敎是已”(《大韓每日申報》 1910년 3월 11일자, 「東國古代仙敎考」)(밑줄: 글쓴이)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선교라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