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6주년을 앞두고 6‧25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까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치열했던 한반도를 미국에서 생산한 기록으로 기억하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중앙도서관(관장 임원선)은 오는 21일(화)부터 7월 29일(금)까지 본관 1층 전시실에서 6‧25전쟁 66주년 기획전시 ‘6‧25전쟁, 미 NARA 수집문서로 보다’를 개최한다. 미국 국가기록원(NARA)에서 수집한 6‧25전쟁 관련 주요 기록자료를 통해 6‧25전쟁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 인천상륙작전 시찰.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도서관이 미국 국가기록원(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수집해 소장한 6ㆍ25전쟁 관련 자료 가운데 미 극동군사령부, 국무부, CIA 등이 생산한 문서와 보고서, 미군이 북한에서 노획한 문서, 미 공보처 사진자료 등 130여 점을 엄선하여 전시한다. 전쟁을 체험한 세대에게는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우리 역사의 한 순간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자리로 6‧25전쟁 당시의 긴박함과 전쟁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전시 자료들을 통해 6‧25전쟁을 사실상 주도했던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역할, 전쟁수행 전략 및 이에 따른 미국 소련 중국 사이의 외교전을 살펴볼 수 있다.

6‧25 발발 직전부터 정전협정까지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수행하면서 정보전ㆍ첩보전의 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기록물 수집에 집중하였다. 이는 현지의 바닥정보를 수집하여 향후 군사전략을 수립하는 데 이용하려는 목적이 있었겠으나 더불어 후대에 인문ㆍ사회과학 분야의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 하늘에서 본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전시내용은 전쟁 발발 전후의 주요 상황, 초기 대응, 한강선 전투에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중국군 개입,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3년 간의 전쟁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날짜, 사건 순으로 전개한다. 전시 주제는 1부 ‘그 해, 6월의 포성’, 2부 ‘전쟁을 보는 다양한 시선’, 3부 ‘휴전으로 가는 길’, 4부 ‘시련 속에 피어난 희망'으로 모두 4부로 구성하였다.
특히, 2부 ‘전쟁을 보는 다양한 시선’에서 6‧25전쟁의 주요 인물, 그 중에서도 유엔군과 공산군 측 지도자들의 전쟁전략 문서에서 한국전쟁을 자국의 입장과 시선으로 보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를 선별하여 보여준다.

미군은 북한군의 남침을 예견하지 못했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미 정부 내에서는 북한군의 남침 예견 실패를 놓고 책임 공방이 뜨거웠다. CIA, 극동군사령부를 비롯한 합동참모본부 등의 정보 부서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차에 '워싱턴 뉴스'가 1950년 9월 1일과 10월 5일에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러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이 1950년 3월 10일에 북한군의 남침을 정확하게 예측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 극동군사령부가 "1950년 3월 10일에 6월 경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부에 보고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미군은 북한군의 남친을 예견하지 못했나. <사진=국립중앙도서관>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모스크바 회동

1951년 2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Joseph Stalin)의 회담에서 중국과 소련이 6‧25전쟁에서 협력을 합의한 사항이 기록된 CIA 정보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포기하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계속 싸운다. (2) 중국은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 파견한다. (3) 미국이 만주 폭격을 요청한 맥아더에 동의하는 경우 소련은 중소상호원조조약과 중소 동맹에 의거 일본의 미군 기지를 폭격한다. (4) 한국 파병으로 중국 내 병력이 부족한 요새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은 소련군이 중국 내에 주둔하는 것을 환영한다. (5) 한국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소련은 국제 의용군을 조직해 한국에 파병한다. (6) 소련은 중국에 탱크와 트럭, 연료와 탄약 지원뿐 아니라 해공군 병력을 파견한다. (7) 중소 국경의 주요 지점에 대규모 군수품 기지를 세운다.'라는 내용으로 4월 5일에 작성된 것이다.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은 1951년 1월 말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동은 6‧25전쟁의 전개 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2월초 모스크바 방문으로 한반도에서의 미군 축출을 위한 기반 조성과 중국군에  소련의 군사 지원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모스크바 회동. <사진=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은 2004년부터 우리나라 근현대사 연구 기초자료의 제공을 목적으로 미 NARA에서 자료를 수집해 왔다. 이번 전시 자료는 2015년 말까지 수집하여 정리한 230여만 면의 자료 중에서 선별한 자료들이다.

▲ 6.25 전시 포스터.

국립중앙도서관은 이번 기획전시를 통하여 미국 NARA에서 수집한 자료가 우리나라 근현대사 연구에 널리 활용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전시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국립중앙도서관 누리집(www.nl.go.kr/nl/commu/libnews/exhibition_list.jsp)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