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족역사문과공원에 자리한 묘청의 동상 [제공=국학원]

묘청(妙淸, ?년~1135년)은 고려 인종 때의 스님이다. 인종은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안으로는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을 당하며 대신들과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밖으로는 북방의 요나라가 멸망하더니 북송마저 몰락하면서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자리를 잡고 압박해 오기 시작하였다.

이때 고려의 큰 학자인 정지상의 추천으로 홀연히 나타난 ‘스님 묘청’은 개경(현재 개성)의 지덕(地德)이 쇠했으니 왕기(王氣)가 있는 서경(현재 평양)으로 옮기자는 ‘서경 천도설’을 주장하였다.

1127년 2월, 인종은 마침내 정지상과 묘청 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 ‘유신 정교’를 선포한다. 인종이 선포한 정교는 대개 산천신에게 제사하고, 검약을 실천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여 홍익으로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도모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한민족의 전통적인 선도 사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고려는 감히 대국인 금나라를 도모할 수 없다는 반대파와의 갈등이 커지면서 내란으로 비화되고 2년 뒤에는 김부식(金富軾) 등 사대주의자에 의해 진압되어 그 웅대한 뜻이 좌절된다.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金覲)은 고려의 중견 관료로서 송나라의 문장가인 소식, 소철 형제를 너무나 깊이 존경한 나머지 자기의 아들들 이름을 김부식, 김부철로 지을 정도로 유교사상에 깊이 물든 사대주의 관료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필생의 역저인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좌절된 것을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 제일대사건’으로 규정하였다.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 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곱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싸움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불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여 조선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묘청이 승리했다면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사건을 어찌 1천 년래 조선사가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정신의 골간으로 국가적으로 진흥되었던 선도는 탄압받게 되고 샤머니즘 또는 무속 등의 일반 기층문화 속에 숨어들게 된다. 고려 중기에 이르면 선도문화가 주류문화에서 하층문화로 전락하고 마는데 그 결정적인 전환점이 묘청이 주도한 ‘서경 천도 운동’의 좌절이다.

김부식은 후일 한민족의 역사를 사대사상에 근거하여 기술한 ‘삼국사기’를 출간한다. 이때부터 우리 한민족은 민족적인 자주성을 상실하고 본격적인 사대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원암 장영주
(사)국학원 상임고문
전국민족단체 연합 대표회장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한민족원로회의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