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의 최치원 선생 동상

 신라 후기, 최치원(崔致遠  857~?)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홀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아버지 ‘견일’은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독려한다.

서기 874년, 18세의 나이에 최치원 선생은 당나라 조정이 실시한 외국인 대상 과거 '빈공과'에서 당당하게 장원급제를 함으로써 아버지의 독려에 화답한다. 이후 17년간 당나라에서 벼슬하며 지은 글이 1만여 수에 달하면서  필명을 떨친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선생의 저서 명이 수록되었고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당나라의 멸망을 예견한 선생은 서기 885년, 신라로 돌아온다. 귀국 후 『계원필경』 20권을 출간하여 훗날 ‘문창후(文昌候)’가 되니 발해, 신라, 당나라까지 이름을 떨친 당대 최고의 석학이며 문장가이다.

선생은 당나라 유학을 통해 유교, 불교, 도교를 깊이 터득하고 선진문물을 배운 지식인으로 신라 발전에 이바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귀국하여 우리의 전통수련 체계인 선도(仙道)의 역사를 적은 선가 사서를 보고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한민족에게는 이미 삼교를 포함하고 오히려 더욱 수승(殊勝)한 도인 선도, 곧 풍류도(風流道)가 이미 전해오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선생은 유, 불, 선 삼교는 인류 시원의 풍류도로부터 갈라져 나가 발전한 것이며, 모든 사상이 포괄된 가르침이 우리 민족에게 이미 있었다는 것을 화랑 ‘난랑의 비’ 서문에서 다음처럼 자세하고 명확하게 적어 전한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풍류교를 만든 근원은 환웅 신시 역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우리 풍류교에 접목되어 각각 다른 종파로 분리되어간 유교, 도교, 불교의 삼교의 핵심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집으로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의 유교’의 취지요,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주주사(노자)의 도이며, 악한 일들을 하지 말고 오로지 착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석가모니)의 불교로 변해갔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神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또한 9천 년 전부터 구전되어오다가 5천 년부터는 한민족의 고유한 글자인 ‘녹도문’으로 전해오던 천부경(天符經)을 해독, 한문으로 번역하여 지금 우리에게 전한 공로가 무엇보다 지대하다.

천부경은 인문과학이 끝없이 증명해야 할 ‘오래된 미래의 경전’이다. “우주는 시작 없는 시작이고, 끝없는 끝으로 존재한다”는 ‘일시무시 일종무종일(一始無始 一終無終一)’은 이미 과학을 초월한 우주론이다.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다섯 글자는 인간 모두가 한없이 존귀하고 평등하다는 영원히 빛나는 인문학적 가르침이다.

천부경은 이미 과학과 종교를 초월하였기에 반드시 지구인을 구원할 평화의 가르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정신사의 완성인 천부경을 전한 최치원 선생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한민족 역사문화공원의 최치원 선생의 동상 주변에는 때맞추어 봄꽃이 활짝 피었다.

원암 장영주
(사)국학원 상임고문
전국민족단체 연합 대표회장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한민족원로회의위원